굽이굽이 걸어 푸르메동산 가는 길

김홍식

푸르메재단 기획실장




산을 걷다 보면 굳이 돌아가는 길도 나쁘지 않을 때가 있다. 새 길을 걸으며 우연히 맞닥뜨린 색깔 고운 꿩 한마리의 퍼드득 달아나는 소리가 잔잔함 중에도 강한 스타카토의 리듬을 선사하기도 하고, 군데군데 마련된 앉을 자리의 흔적에서 먼저 지나가신 분들이 남긴 명상의 향취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신문지 깔아 쓰시고 버리고 가신 분이 있는가 하면, 그 쓰레기를 주어 담으면서 흉보는 말 한마디 없이 "운동삼아 하는 것인데 뭐. 나 좋자고 하는 거지" 하시는 어르신들도 만난다.


언제나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삶


돌아서 먼 길 걷다 보면 발이 피곤할 때도 있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많다. 이 길 저 길 걸을 때는 몰랐지만, 발로 산을 걷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산을 읽게 된다. 또 집에서 울려퍼진 높은 음조의 바가지도 들을 때는 경쾌하지 않지만 피곤한 발을 되돌릴 때가 되면 여러 악장중의 한 악장으로 제자리를 찾아갈 준비를 한다. 월광 소나타를 3악장부터 듣기엔 내게 너무 빠르지만, 느린 1악장의 여운과 함께 어울리게 되는 것인지, 피곤함을 동반하는 먼 길은 숨가쁘게 되돌아 가야 할 집이 그립도록 만든다. 어쩌면 멀리 있는 저 산을 마음에 담아 집으로 오는 것이다.



숨가쁘고 가파른 길에서 내 숨 토해 내기도 바쁜 것처럼 새로운 어귀에 접어들 때마다 힘들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어떤 이는 저 멀리 가고 있으면서도 갈수록 먹고 마실 것이 배낭에 가득한데, 나는 예서 헐떡대고 있으면서도 길을 잘못 접어들었는지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배낭 속 재물은 물에 소금 녹듯 줄어만 간다. 이런 모양으로 우리 삶은 고통의 굴곡을 걷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만 미끄러지는 이상한 길에서 나만 벼랑에 매달려 버둥대는 악몽 같은 모습.


이런 모습으로 나보다 훨씬 더 악몽같은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을 예전에는 하지 못하고 살았다. 심하게 미끄러지지는 않았어도 '나름대로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면서 미끄러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했던 것은 '주변을 돌아보지 못해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말씀아닌 말씀처럼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울리기 시작한 그 소리가 점점 더 크고 다채로운 음조로 들리는 것만 같다. 어디선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시는 분이 내 가까이에 숨어 있는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그 분은 "그게 나다"라고 말씀하실 만큼 직설적이지 않지만, 무대 없는 오케스트라의 마당으로 불러 내시는 듯하다.


홍은동 황천의 길목


꽤 오래 전 신혼살림을 차리고 첫 직장에서의 일이 쉽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본가에서의 일을 마친 뒤 늦은 밤이었다. 우로 굽은 대로변의 언덕길을 걸어 올라갈 때 길바닥을 긁는 마찰음과 날카로운 불꽃을 동반하는 바람이 휙하며 우측 어깨 1m 지점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 너무 찰나여서 그것이 스쳐 지나갈 때는 몰랐었고 뒤에서 꽝하는 굉음에 놀라 뒤돌아 보고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자동차 한 대가 좌로 굽은 내리막길을 달리던 중 보드블럭을 긁으며 인도로 치고 들어와 10m 간격의 가로수 두 그루의 허리를 잘라 놓고도 모자라 담벼락을 들이받고서야 멈춘 것이다. 내 허리보다 두 세 배는 질길 가로수가 잘려 넘어진 모습을 보며, 사람의 행과 불행을 그리도 쉽게 갈라놓을 수 있는 찰나의 위협에 떤 적이 있다.



'내 걸음이 몇 초만 늦었거나 그 운전자의 핸들링이 수십분의 몇 초라도 더 빨리 풀려 버렸었다면 내가 저 가로수 신세가 되었을 것이고 아마도 즉사했거나 살았어도 전신마비, 하반신 불수의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서강대 예비자 교리학습에 열심이던 나는 그 운전자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감사의 기도만 드렸을 뿐이다.


그리고 한 동안 그 공포를 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기억상실증과도 비슷한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고서야 도처에 나를 잡아먹으려는 맹수들이 득실거린다는 피해망상으로 정신병원에 있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포식자가 이제는 맹수가 아니고 인간과 그들이 만든 기계라는 사실이 더 끔찍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요즈음도 버스 중앙차로와 일반차로 사이의 승하차 길목에서 푸른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와 이웃을 사이에 두고 지나치는 버스와 승용차들이 차선을 준수해 운행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달리 보면 그것처럼 다행스러운 일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몰랐던 축복과 그 전주곡


홍은동 황천의 길목에서 나도 그렇게 예고도 없이 가혹하게 넘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벼랑에 매달려 차라리 떨어져 버리고 싶은 절망의 포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쨋거나 그 끔직한 운명의 확률 게임을 뒤로 하고, 여느 사람처럼 여느 직장에 다니며 생계와 눈 앞의 미래를 걱정하고 '나름대로 주변을 돌아볼 여유 없이' 살아 오면서 나만 미끌어지고 넘어지는 줄 알았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갑상선 질환, 그리고 또 침 한 방으로 쉽게 해결될 줄 알았지만 수시로 습격하는 요추염좌. 보다 풍요로운 삶을 좇다가 다시 덜 가난한 삶을 좇기도 하며 이 길 저 길을 걸으며 숨을 몰아쉬는 그런 모습...


하지만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역설인지 부적절한 비유인지는 몰라도 '주변을 돌아볼 여유 없이' 내 코 앞만 보고 걷다보니 미끄러지고 넘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지치고 좌절할 수 있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들려온 그 말씀이 나의 주변을 다시 보게 만들었고, 그 때 푸르메재단을 만나게 된 것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시는 그 분이 만들어 주신 새로운 축복의 음악이라 여긴다. "나는 연주할 줄 아는 악기가 없어요", "바이올린을 살 돈도 없어요"라는 대답이 내 입가에 맴돌기도 전에, 보이지 않는 그 지휘자는 나 자신을 악기로 쓰시려고 미리 여러가지 전주곡을 들려주신 것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슬프게 또 때로는 경이와도 같이 다가오는 다른 여러 전주곡들: 매일 아침을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마감하시는 아버지. 우리 조상의 정서와 언어에 스며든 조상신, 천지신명, 관세음보살께 그저 가족의 안위와 건강, 화목을 기원하신다 (늘 "네 발 1m 안에 위험이 있음을 항상 명심해라"는 당부와 채근의 말씀을 잊지 않으신다). 전율처럼 나를 사로잡았던 아내와의 사랑. 경이와도 같았던 새로운 생명의 탄생. 우연히 접하게 된 국선도와 원공학회에서 갖가지 질병을 퇴치하고 다시 되찾은 건강.. . 이렇게 또 저렇게 여러가지 길목과 어귀에서 또 갖가지 음조로 들려왔던 것 같다.


장애환자들에게 희망이 되고자 하는 푸르메병원


그 전주곡의 여운을 품에 안고 장애환자들이 펼치는 재활의 꿈과 함께 하려고 한다.


그 꿈들이 생명의 몸짓으로, 희망의 메세지로 연주되는 아름다운 푸르메동산의 오케스트라에 함께 하고 싶다. 희망과 사랑을 되찾게 하는 생명의 동산에서 여러분들을 만나고 싶다. 내가 아는 죄보다 모르는 죄가 더 많은 것처럼, 그 반대의 길로, 우리가 모르는 축복의 울림이 더 크게 울려퍼질 푸르메동산의 길로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


 


기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