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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의사회 <장애인요양원 짓는다> [조선일보]

[우리이웃] ‘행동하는 의사회’ 이 젊은 행동!

90년대 학번 2030 의사들 “장애인 요양원 짓는다”

18일 저녁 서울 대학로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 ‘음악 그리고 나눔 한뼘 더’ 공연을 몇 시간 앞두고 젊은 의사 20여명이 모여들었다. 병원일을 마치자마자 달려오는 길이다. ‘진행요원’이라는 명찰을 단 이들은 티켓 배부, 포스터 부착, 좌석 안내 등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공연에 초대된 장애인 40명의 휠체어를 미는 것도 이들 몫이었다.

피아니스트 김광민과 노영심, 색소폰 주자 손성제, 기타리스트 한상원, 이정선, 그룹 ‘불독맨션’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이름 있는 뮤지션들이지만 출연료는 없었다. 공연장은 환호와 갈채로 달아올랐다. 이날 공연은 젊은 의사들의 모임인 ‘행동하는 의사회’가 중증장애인 요양시설 건립기금을 모으기 위해 마련한 행사다.

표를 팔아 모은 기금뿐만 아니라 회원들 스스로 적잖은 돈을 모았다. 대부분 전공의 과정을 밟고 있는 젊은 의사들이었지만 1000만∼1500만원씩 되는 거금을 기탁한 회원들도 적지 않았다. 1000만원을 내겠다고 약정한 남희태(30·공중보건의)씨는 “은행빚이라도 얻어서 낼 생각인데 아내가 알면 큰일난다”며 웃었다.

서울백병원 전공의 3년차인 하정구(29)씨는 역시 의사이자 회원인 아내 김하경(29)씨와 함께 1500만원을 기탁하기로 했다. 그는 “지금은 1년 연봉 70∼80%에 맞먹는 거금이지만 뜻깊은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모은 돈이 1억5000여만원. 올해 목표액 1억원은 이미 초과 달성했다. 이들은 2006년까지 10억원을 모아 지속적인 보살핌이 필요한 중증장애인 30여명이 무료로 생활할 수 있는 요양원을 건립할 계획이다.

‘행동하는 의사회’는 지난 2000년 의약분업 시행 과정에서 선배들이 보인 행동에 실망한 ‘예비 의사’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당시 공보의로 복무 중이던 정상훈(33·서울의대 91학번) 대표는 “사회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의사들이 국민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모습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이듬해인 2001년 90년대 초·중반 학번 20여명이 모여 ‘행동하는 의사회’를 결성했다.

처음엔 서울지역 의대학생회에서 활동한 ‘운동권’ 출신들이 주축이었다. 하지만 운동권이 아닌 이들이 대거 참여해 지금은 숫자가 100여명으로 늘었다. 대부분 인턴이나 전공의 또는 공중보건의 과정을 밟고 있는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젊은 의사들. 특정 정파를 향한 지지나 반대 목소리를 높이거나 기존 의료인 단체에 반기를 드는 대신 조용한 ‘나눔과 열림’을 통해 의료계를 향한 국민의 불신을 씻어내는 것이 목표다. 정 대표는 “구호보다는 국민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실천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실천을 위한 회칙 중 하나가 ‘소득의 10%를 회비로 낸다’는 것이다. 이 정도를 낼 수 있는 의사라야 국민과 의료인들 간에 갈등이 생겼을 때 주저 없이 국민의 편에 설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모은 회비 중 절반은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된다. 올해는 매달 300여만원이 ‘노들장애인 야간학교’ 등 두 곳에 보내졌다. 나머지 절반은 무료 진료에 필요한 의약품 구입비와 운영비 등으로 쓰인다. 회원들은 주말마다 노원구와 종로구에서 재가 장애인과 쪽방 노인들을 위한 무료 진료 봉사활동도 펼치고 있다.

올해 회원으로 가입한 김창기(29·신촌세브란스병원 전공의 과정)씨는 “처음 ‘10% 기부’ 얘기를 들었을 땐 좀 황당하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취지를 들은 후엔 의사의 사회적 책임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고 말했다. 회원 중 유일한 개업의인 이윤정(여·32)씨는 소득의 10%가 훨씬 넘는 150만원씩을 낸다. 이씨는 “개업한 지 얼마 안 돼 넉넉한 편은 아니지만 그나마 형편이 가장 나은 내가 좀 더 부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10% 기부운동은 의료계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아주대 이일영 교수(재활의학과)는 “1년 전 한 젊은 의사가 찾아와 10% 나눔운동을 설명했을 때 느꼈던 감동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이 교수는 요양원 설립 추진위원장직을 맡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다.

아직 회원수도 적고 경제적 기반도 약해 어려움이 많다는 점은 회원들 스스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회원들은 “지금 우리의 다짐과 실천이 의료계의 큰 물줄기를 바꿀 작은 흐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규민기자 [ min4sally.chosun.com])

[조선일보 2004-12-19 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