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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1> 이국땅 오지에서 만난 불행 [프레시안] 2006-06-28

‘인생의 차선변경’

[우리 곁의 재활병원] <1> 이국땅 오지에서 만난 불행

2006-06-28 오전 9:27:09

 

최근 한 주부가 8년간의 소송 끝에 받은 피해보상금 10억 원을 자신과 같은 처지의 장애환자를 위한 재활전문병원 건립기금으로 내놓아 우리 사회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그 주인공은 영국 오지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뒤 영국과 독일 재활병원을 체험한 황혜경 씨다.
황 씨와 푸르메재단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는 남편 백경학 씨는 “불행은 나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올 수 있는 것”이라며 “우리사회에도 하루빨리 환자의 물음에 늘 응답하는 아름다운 재활전문병원이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황혜경-백경학 부부가 인생의 큰 굴곡을 건너 이제는 비슷한 처지의 장애환자들에게 손을 내밀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어본다. <프레시안>은 이러한 노력이 우리사회를 보다 인간의 체취가 나는 곳으로 만드는 작은 손길일 수 있다고 보며,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인생은 늘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부침을 겪는다. 그것이 삶을 뒤흔들 수도 거대한 바람일 수도 있고 인생의 잔가지 몇 개를 부러뜨리는 소슬바람일 수도 있다. 때로는 추위 속에 희망을 약속하는 온풍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와 내 가족이 8년 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겪은 사건은 삶의 뿌리가 뽑힐 만한 세찬 태풍이었다. 되돌아보면 삶의 뿌리를 흔들고 지나간 폭풍우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은 그 어려운 고비 고비 마다 우리에게 내민 많은 사람들의 도움의 손길 때문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불행은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의 문제였을 뿐

1998년 여름, 영국에는 유난히 많은 비가 내렸다. 그해 6월부터 두 달 반 동안 우리 가족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소도시 칼라일 병원의 중환자실에 머물고 있었다. 이곳은 우리의 강원도 영월과 정선에 해당하는 오지였다. 스코틀랜드 여행 중 갑자기 뒤로 나타난 한 대의 벤츠 승용차가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인생의 차선이 한 순간의 사고로 크게 변경됐다. 중환자실에서 혼수상태에 있는 아내를 지켜보며 나는 마치 눈물샘이 고장 난 듯 흐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평생 흘릴 눈물을 그때 다 흘렸으리라.

▲ 사고를 낸 차량과 가해자의 뒷 모습 ⓒ프레시안

▲ 1998년 6월 9일 사고직후 트레일러 운전사가 황씨에게 점버를 덮어주고 있다. ⓒ프레시안

  늘 낭만과 신비로 가득 찬 ‘백야’를 동경했지만 내가 현실 속에서 맞닥뜨린 ‘백야’는 고통과 슬픔에 찬 ‘백야’였다. 밤 11시가 넘어 하늘이 어두워지고 새벽 세 시가 되면 어김없이 뿌옇게 밝아왔다. 일주일째 내리는 여름비는 한국의 장맛비처럼 하염없이 중환자실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매일 새벽 우울한 백야를 맞이했다. 고대 스코틀랜드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잉글랜드인들이 설치한 거대한 암석장벽이 병실 창문 밖으로 보였다. 장벽 위로 흰 갈매기와 부리가 노란 까마귀들도 먹구름 속을 낮게 비행하곤 했다.

아내는 혼수상태였다. 사고 몇 시간 전만해도 우리는 2년간의 독일생활을 마치고 맞게 될 한국에서의 생활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그리워했던 친지들을 만나고 고국 음식을 맛보는 것을 상상했다. 독일생활은 행복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인근에 있는 호반도시 프리엔의 기숙사에서 우리는 독일 생활을 시작했다. 주말이면 각국에서 온 20대 초반의 젊은이들과 어울려 토론도 하고 고물 승용차를 빌려 알프스와 이탈리아로 소풍을 다니기도 했다. 어학코스가 끝나자 우리는 뮌헨으로 이사해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다. 아침 일찍 아이를 유치원에 맡기고 강의가 끝나면 아내와 도서관에 나란히 앉아 공부를 했다. 주말이면 유학생들을 초대해 맥주파티를 열기도 했고 벼룩시장을 헤매고 다니기도 했다.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불행이란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의 문제였다.

귀국을 한 달 남겨놓은 시점에 나는 아내에게 추억을 만들자며 자동차로 영국을 여행할 것을 제안했다. 아내는 내 성화에 못 이겨 따라나섰다. 폭풍의 언덕이 펼쳐진 스코틀랜드가 우리의 최종적인 여행지였다. 스코틀랜드의 고성 에딘버러와 경제중심지 글래스고를 거쳐 우리는 런던으로 향하고 있었다. 집이 있는 독일 뮌헨으로 돌아가면 한국으로 이삿짐을 부치는 일만 남아 있었다.

한 순간에 날아가버린 행복

아내는 자동차 트렁크 속에 필요한 물건이 있다고 했다. 시야가 툭 터진 오르막길에 비상등을 켠 채 자동차를 세웠다. 길가에 잠깐 차를 세운 일이 이렇게 큰 결과를 불러오리라 누가 상상했을까. 자동차 트렁크를 열고 딸애 속옷을 찾던 아내에게 자동차 한 대가 돌진해 왔다.

‘꽝’ 하는 굉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났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가해자의 자동차 밑에 깔려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도로 위로 자동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광경이 보였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나는 터져 나오는 비명 속에서 죽음을 생각했다.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와 자동차를 번쩍 들어 그 아래 깔린 나를 끌어냈다. 쓰러져 있던 아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내는 다리에 많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딸애는 튕겨져 나간 우리 자동차 안에서 창문에 매달린 채 울고 있었다.

“당신! 살아 있어? 정신 차려 봐!” 나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아내는 말이 없었다. 내가 계속 고함을 치자 정신이 들었는지 눈을 떴다. 핏기가 가신 얼굴이 평온했다. 나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내는 살아 있었다. 가해자는 정신없이 핸드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40대 초반의 남자였다. 나는 자동차로 기어가 조수석에 있던 카메라를 꺼냈다. 사고현장과 피의자의 모습을 정신없이 담았다. 내가 찍은 사진들은 나중에 사고의 책임이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는 가해자측 보험회사의 주장을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이 사진들로 인해 가해자측 보험회사는 법리논쟁에서 불리해질 것 같자 사고 8년만인 2006년 5월말 극적인 합의를 요청해 왔다.

▲ 사고직후 혼수상태 모습(1998년 6월) ⓒ프레시안

나중에 영국 경찰을 통해 안 일이지만 가해자는 평소 편두통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날도 두통약을 여러 알 먹고 운전하다 정신을 잃고 사고를 냈다고 했다. 그가 마약이나 술을 먹지 않고 정말 두통약을 먹었는지, 사고 직후 경찰에 도움을 청했는지 확인해달라고 스코틀랜드 검찰에 요청했지만 그들은 거절했다.

뒷걸음질 치는 운명…불행의 시작…

누구나 그렇지만 서울에서의 생활은 24시간으로 부족하다. 사회부와 정치부 기자였던 나는 늘 일에 쫓겼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열심히 일했지만 일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무언가 재충전이 필요했다. 이렇게 살다 건강과 가족을 모두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고 나는 도망치듯 독일 대학에 연수를 신청했다. 다행히 언론재단과 회사로부터 2년 동안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나는 이런 사실을 아내에게 알렸지만 그녀는 기뻐하지 않았다. 교통문제와 시민의식 등 서울시의 여론조사를 담당했던 아내는 자기 일을 사랑했다. 아내는 몇 달 전 직장을 다니다 가톨릭 신학교에 들어간 동생이 마음에 걸렸고 홀어머니를 덩그렇게 남겨놓은 채 외국으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 아내가 지금 이렇게 내 눈 앞에서 쓰러져 있다니!

아내는 구급차에 실리면서 말했다. “나는 괜찮아요. 민주가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 아내의 청바지는 유혈이 낭자했다. 고통의 순간에도 딸애를 걱정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신비로웠다. 두 시간이면 끝날 거라는 수술이 훌쩍 8시간을 넘겼다. 천정에 매달린 전구 두 개와 ‘씨어터’라고 씌여진 수술대기실이 황량하게 보였다. 아내가 드디어 들것에 실려 나왔다. 아내는 혼수상태였다. 아내를 붙잡고 흔들던 나는 까무러칠 듯 놀랐다. 아내의 왼쪽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운명이 뒷걸음질 치는 것 같았다. 한 남자가 다가와 설명했다. 수술을 담당한 의사라고 했다 “당신 부인이 워낙 출혈이 심해서 살리기 위해서는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한 스코틀랜드 사투리였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하느님이 나에게 이렇게 가혹한 시련을 주실 수는 없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아내에게 이렇게 큰 고통을 주시는 건가?’ 나는 하느님을 원망했다. 그러나 아내의 다리 절단은 불행의 시작에
불과했다.

‘빈손의 하느님’ ‘인간의 얼굴을 한 하느님’과 만나다

아내는 가톨릭 모태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학창시절 성가 단원과 교리 교사를 맡을 정도로 성당활동에 열심이었다. 우리 집안도 어머니와 형수, 누나가 성당에 다니고 있었다. 아내는 독일 뮌헨에 도착하자 한인성당을 찾아 나섰다. 나는 매주 아내를 성당에 태워다 주고 오랜만에 우리 교민을 만날 수 있다는 이유로 성당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앙에 대해 나는 적지 않은 거부감과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 1997년 사고전 독일에서의 모습 ⓒ프레시안

내가 한국에서 신앙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독재에 맞서 사회주의 이론이 범람했던 80년대 초 대학을 다니며 이념서적을 탐독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기자 생활을 하며 알게 된 일부 고위 성직자들, 특히 일부 기독교 고위 성직자들의 이중적인 태도에 환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늘 화해와 용서를 외치던 그들이 가정과 교회 밖에서 얼마나 탐욕스럽게 변하는지 목격했다. 그들에 대한 불신은 그들이 믿는 이상한 하느님을 더더욱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시 뮌헨에는 신부, 수녀, 목사들이 많았다. 교구와 수도회, 교회에서 뽑혀서 혹은 자비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 부부는 이 분들을 집으로 초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1차대전의 폐허 속에서 토마스 만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밤새워 토론을 벌였던 뮌헨 슈바빙 거리의 카페에서 그들을 만났다. 흑맥주를 앞에 놓고 한국 정치와 종교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함께 걱정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됐다.

이들은 한국에서 만난 성직자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특히 유학 온 신부, 수녀님들의 소박한 모습은 종교와 성직에 편견을 갖고 있던 나를 놀라게 했다. 가톨릭 내 민주화와 여성 사제직 도입 등에 대한 진보적인 태도는 교계정치와 세속화로 비쳐진 종교를 새롭게 평가하는 계기가 됐다. 로만 칼라와 베일 속에서 소박과 정결뿐 아니라 한국 가톨릭의 진보성과 합리성을 나는 발견한 것이었다. 이들이 사는 기숙사와 성당 내 숙소를 방문할 기회가 많았는데 책 수십 권과 옷가지 몇 벌, 컴퓨터가 이들이 가진 재산의 전부였다. 이에 비해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 이들이 믿는 빈손의 하느님, 인간의 얼굴을 한 하느님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 영국 칼라일병원 본관 ⓒ프레시안


▲ 1997년 독일사람들과 함께 ⓒ프레시안

지금 서강대에 계신 예수회 김용해 신부와 부산교구 홍경완 신부, 수원교구 황치헌 신부 등을 만나면서 나는 가톨릭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이듬해 초 사고가 나기 넉 달 전 나는 뮌헨 프라우엔(성모) 성당에서 독일 추기경 님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가장 어려운 순간 가톨릭 신앙은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빗줄기에 내 눈물도 합쳐졌다. 아내는 칼라일 병원으로 옮겨진 뒤 첫 번째 수술 후 고비를 넘기는가 싶더니 수술 부위가 다시 감염되면서 상태가 더욱 악화됐다. 사고의 충격으로 양쪽 신장이 기능을 중단하자 체온이 42도를 넘어섰고 혈압도 270까지 치솟았다. 양쪽 옆구리와 목젖에 구멍을 뚫어 인공 신장과 인공호흡기를 다는 수술을 받았다. 각종 약물과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10여 개의 호스와 링거선을 몸에 꽂고 있었다. 아내는 사고의 후유증과 노폐물을 배출하지 못한 탓에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혼수상태에 빠진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 사람이 과연 내 아내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경학/푸르메재단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