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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6. 작고 아름다운 재활병원을 꿈꾸며 [프레시안]2006-08-03

 

[우리 곁의 재활병원] <6·끝> 긴 마무리와 새로운 시작

2006-08-03 오전 11:15:01

 

푸르메재단 설립서류를 제출한 지 석 달이 지났지만 보건복지부 담당부서에서는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재단 설립허가는 고사하고 심사조차 하지 않았다. 기자 생활을 하며 통일부와 외교부, 서울시청 등 정부 부처를 출입해 봤지만 복지부의 벽은 높기만 했다. 시간이 지연되자 푸르메재단에 관심을 가진 많은 분들이 측면에서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자그동안 꼼짝 않던 실무자들도 비로소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밀고 당기는 실랑이 끝에 결국 2005년 3월 재단을 세워도 좋다는 설립허가가 떨어졌다.

‘격려’와 ‘열정’과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재단이 설립되자 강지원 변호사님이 대표로 추대됐다. 그동안 청소년 문제에 천착(穿鑿)해 오신 강 변호사님은 어머님이 뇌졸중으로 고생하시면서 ‘질병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가’ 절감하셨다고 했다. 변호사님은 흔쾌히 대표직을 수락하셨다. “내가 검사 시절부터 청소년 문제를 전공해 왔는데 이제 장애환자와 재활병원 문제도 공부하게 되어서 적잖게 걱정이 돼요.” 말씀은 이렇게 하셨지만 워낙 열정과 재능이 있는 분이라 나는 “변호사님, 한 달만 공부하시면 청소년문제보다 훨씬 전문가가 되실 겁니다”라고 응원했다.

강 변호사님과 본격적으로 일을 하면서 수시로 감탄한다. 거의 한 시간 간격으로 하루 몇 개의 약속이 있지만 푸르메재단 일이라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오셨다. “백 이사! 잠을 자려다 생각났는데 일단 기업의 홍보책임자를 설득합시다.” 밤 11시건, 12시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전화를 주셨다. 아마 너무 바빠 재단 일을 잊고 계시다가 잠자리에 드시면 ‘푸르메재단’이 인생의 업보처럼 생각나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늘 온화함을 잃지 않으시고 “걱정 말고 추진하세요. 하느님이 우리 재단을 도우실 겁니다.” 격려해 주시는 김성수 총장님과 일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치신 강지원 변호사님 밑에서 1년 넘게 일하면서 ‘푸르메재단이 갈 길이 멀지만 가능하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 홍보대사 위촉식. 강지원 대표, 이지선씨, 강원래씨(2005년 5월) ⓒ프레시안

재단이 설립되고 두 번째로 한 것은 재단의 설립취지와 장애환자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두 사람을 홍보대사로 위촉한 일이다. 홍보대사로 위촉된 한 사람은 2000년 11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불법 유턴 차량과 부딪혀 하반신 마비가 된 인기가수 강원래 씨였다. 다른 한 사람은 이화여대 졸업반이던 2000년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귀가하는 길에 음주 차량의 교통사고로 전신 화상을 당한 이지선 씨였다. 지선 씨는 화상으로 인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재활심리학을 공부하며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인생의 쓴 맛’을 경험을 했지만 ‘인생을 맛있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최근에는 강원래∙ 이지선 씨를 비롯해 김혜자∙ 박완서 선생님, 장영희 교수님, 작가 고정욱 씨 등 23명이 장애의 아픔을 이겨낸 원고를 한 편씩 기부하면서 재단에서 에세이집 <사는 게 맛있다>를 출간하기도 했다.

설립된 지 불과 1년 만에 푸르메재단은 장애인 100명의 삶을 표현한 사진전시회를 비롯해 장애인 음악가와 인기가수가 어울려 노래한 테마 콘서트, 저소득층 장애인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연탄을 배달하는 행사, 국내 처음으로 장애인과 자원봉사자 90명의 판문점 방문 등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다양한 행사를 개최했다.

▲ 장애인 사진전 개막식 ⓒ프레시안

▲ 저소득 노인들에게 연탄나눔행사(왼쪽부터 김성구 샘터사 사장, 강정원 국민은행장, 강지원 변호사, 이동섭 대한석탄공사감사) ⓒ프레시안


▲ 장애인과 함께한 판문점 행사 ⓒ프레시안

‘환상통’을 넘어서서

독일 자동차 보험회사에서는 사고 직후 아내의 소송을 위해 스코틀랜드 현지 변호사와 독일 변호사 두 사람을 선임해줬다. 아내가 1년 동안 독일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은 뒤 1999년 말 귀국하면서 나는 독일 보험회사에 아내를 위해 일해 줄 한국국제변호사가 필요하다고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독일 보험회사는 한국이 유럽연합(EU)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변호사를 지원할 수 없다는 답변이 왔다. 아내를 위해 일해 줄 한국 변호사가 없다면 사건의 해결은 물론 피해보상조차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수소문 끝에 나는 부천에서 오랫동안 노동자 변론 활동을 해 온 이양원 선배를 찾아갔다. “언제 소송이 끝날지 모르지만 우리 사건을 맡아줄 국제변호사가 필요합니다.” 이 선배는 즉석에서 적임자를 소개해줬다. 이양원 선배가 소개한 사람은 법무법인 광장의 안용석, 장우영 변호사였다. 두 사람은 M&A 분야의 전문가였다. 안용석 변호사는 우리 부부를 보자 “제 누님도 대학을 졸업하고 인도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숨지는 불행을 당했습니다. 누구보다 두 분의 아픔을 이해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일하는 만큼 수임료는 받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소송이 20년이 걸릴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피해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각오를 하십시오.” 그는 진심으로 우리 부부의 불행을 위로하면서 마음을 강하게 먹을 것을 요구했다.

우리 부부는 지난 5월 상대측 보험회사인 콘힐 알리안츠과 8년 동안 끌어 온 소송에 합의한 직후 사례를 위해 안용석 변호사를 찾아갔지만 그는 수임료를 받지않았다. 아내가 피해보상금의 절반을 재활전문병원 건립기금으로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힌 만큼 자신들의 수임료도 좋은 뜻에 포함시켜달라고 말이다. 안 변호사는 “저는 피해보상을 받지 못할까 마음을 졸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나 다행입니다. 살다보니 이렇게 행복한 날도 오는군요”라며 활짝 웃었다. 우리는 그동안 고생한 두 변호사의 손을 잡고 놓지 못했다.

하지만 불과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우리 부부는 가해자 측 콘힐 알리안츠 보험회사와 지루한 싸움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8년이라는 기간이 우리에겐 지루한 장마였다. 잊을 만하면 사고와 관련된 서류와 증명서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얼마나 많은 서류를 요구했는지 영국에 보낸 것 만해도 4000페이지가 넘었고 바인더 파일이 10개나 됐다. 한 해에도 몇 번씩 나와 딸애에 대한 건강증명서를 비롯해 아내가 서울시청에 복직했을 때 받을 수 있는 봉급표 등을 요구했다. 한 번도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요구하는 데에 화가 났다. 그렇다고 안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가 근무했던 서울시청에 염치없이 찾아갔지만 같이 일했던 동료들은 두말없이 아내와 같은 직급 직원의 봉급표를 만들어 주었다. 주치의였던 신촌세브란스 재활병원의 신지철 교수님은 긴급하다고 연락을 하면 지방 출장 중에도 돌아와 진단서를 만들어 줄 정도로 너무 많은 수고를 했다.

아내는 영국으로부터 연락이 올 때마다 심리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교통사고는 피해자의 육체뿐 아니라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아내는 매일 4시간씩 집안과 밖에서 걷는 운동을 하면서 지팡이 두 개로 평지를 걸을 정도로 좋아졌다 하지만영국에서 연락이 왔다는 소식만 들으면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식사도 하지 못했다. 악몽이 되살아난 날에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한 달에 두세 번 찾아오는 환상통(幻想痛)도 고통이었다. 실제로 다리가 없었지만 마치 다리에 전기충격을 가하는 것처럼 2~3초 간격으로 찾아오는 도깨비 통증(팬텀스 패인)에 아내는 밤새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렸다. 때때로 구토할 정도로 심한 편두통과 손 떨림, 말더듬 증세도 교통사고 후유증의 하나였다. 교통사고는 시간이 지나면 다 나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부터 여러 가지 후유증이 나타나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인지 모른다.

“이제 용서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해자 보험회사에서 시도 때도 없이 “황혜경 씨의 정신적, 육체적 상태가 얼마나 회복됐는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안용석 변호사는 “한국 병원에서 더 이상 해줄 것이 없고 2달밖에 입원이 안되기 때문에 집에서 재활훈련을 하고 있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면 상대측에선 “병원이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는 것은 거의 회복됐다는 것을 뜻하는데 왜 취업을 하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그들은 한국 장애인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세계 교역량 11위, OECD 회원국인 한국에서 병실이 없어 환자가 전국을 유령처럼 떠도는 상황을, 내가 상대측 변호사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황혜경씨 기금 전달 ⓒ프레시안

가해자 측 보험회사와 계속되는 공방전도 참기 힘들었지만 사고를 낸 가해자와 보험회사로부터 8년이 지나도록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한 것이 우리를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 책임소재를 둘러싼 논쟁을 벌이면 벌일수록 그들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커졌다. 뉴스에서 ‘영국과 스코틀랜드’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이러다 미칠 것 같았다. 어느 날 아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더 이상 그를 미워하지 말아요, 이제 그를 용서할 때가 된 것 같아요. 그래야 우리가 편안하게 살 수 있어요.”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해자에 대한 미움이 조금씩 잊혀져 갔다.

분노가 사라져갈 즈음인 지난 5월 중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처음으로 법정이 열린다는 연락이 왔다. 나와 변호인단은 갑자기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해졌다. 개정 시한을 불과 보름 정도 앞두고 가해자 측 보험회사에서 처음으로 피해보상액을 제시했다. 50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9억 원이었다. 상대측은 보상액을 제시하면서 “당신들이 사고에 기여한 과실률을 적용할 경우, 이보다 훨씬 적은 금액이 될 것”이라며 “이것이 마지막 제안”이라고 위협했다. 나와 아내는 분노했다.

▲ 안용석 변호사, 설미영씨, 장우영 변호사(왼쪽부터) ⓒ프레시안

나는 편지를 썼다. “가해자가 사고를 낸 직후 구조대가 아닌 곳에 휴대폰을 거는 장면을 비롯해 당시 정황을 담은 증거사진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피해보상을 못 받더라도 현지 법정에서 끝까지 시시비비를 가리겠다”는 내용이었다. 편지 내용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법정까지 갈 경우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 것을 우려했는지, 상대측은 며칠후 피해보상액을 두 배로 올려 100만 파운드로 제시했다. 우리 부부는 앞으로 몇 년간 지루하게 계속될 법정소송을 벌이느냐를 놓고 고심했다. 우리 측 스코틀랜드 변호사와 안용석 변호사는 두 팔을 걷고 말렸다. 소송에 승리하더라도 상처뿐인 승리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결국 그쪽에서 제시한 107만5000파운드를 수락했다. 8년 동안 지루하게 계속된 싸움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되돌아보니 참 멀고도 먼 여정이었다.

이제 우리도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싶다

아내의 스코틀랜드 변호사로부터 소송을 종결한다는 연락을 받고 나와 아내와 함께 집 근처 의 공원을 찾았다. 5월의 하늘이 눈부셨다. 영국 칼라일 병원의 응급실에서 아내가 생사를 넘나들 때 보았던 먹구름 대신 5월의 태양이 빛났다. 나와 아내는 “8년간 거대한 태풍 때문에 우리 가족의 뿌리가 뽑힐 정도로 힘들었지만 이제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고 다짐했다. 다음날 은행으로부터 피해보상액이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내는 다른 비용을제외하고 보상액의 절반인 50만 파운드를 푸르메재단에 내놓았다.

가끔 혼수상태에 빠진 아내를 바라보며 눈물 지었던 순간들이 생각난다. 스코틀랜드 오지병원의 응급실 창 너머로 낮게 드리워진 먹구름과 그 아래를 유영하던 갈매기와 까마귀의 노란 부리까지 기억 속에 선명하다. 그때가 손에 잡힐듯 한데 벌써 8년의 시간이 흘렸다. 가끔 아문 상처를 매만지듯 그때의 심정을 곰곰이 되새겨본다. 우리 가족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넘어야만 했던 그 험한 산과 물보라 치던 강물이 이제 되돌아보니 작은 봉우리와 냇물처럼 보인다. 그렇게 애를 끊을 듯 힘들었던 시절도 지나고 나니 고통과 감동스런 기억이 중첩돼 내가 지나온 수많은 작은 오솔길처럼 보인다. 생사의 갈림길이 떠오를 때마다 우리를 향해 내밀어준 수많은 도움의 손길이 생각난다. 그리고 우리가 겪은 고통을 지닌 채 험한 산과 깊은 물을 건너게 될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다.

‘하느님께서 아내에게 그렇게 큰 고통을 주시고 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 오늘도 곰곰이 되새겨 본다. 푸르메재단이 설립하게 될 작고 아름다운 재활전문 병원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백경학/푸르메재단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