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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강태원복지재단]환자중심 재활전문병원 건립의 시작

백경학 푸르메 재단 상임이사는 언론사 기자로 활동하던 1996년, 해외연수 중 교통사고를 당해 부인이 한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사고 후 지리한 피해보상과 재활치료 과정에서 국내 장애인 재활전문병원 건립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옥토버훼스트’ 창업자이기도 한 백경학 상임이사는 장애인재활전문병원 건립의 희망을 일구기 위해 현재 푸르메 재단 상임이사로서 직접 현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최근 교통사고 피해보상금을 받아 절반(10억 원)을 푸르메 재단에 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환자중심 재활전문병원 건립의 시작

<효자동 구텐 백>의 저자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백경학 씨. ⓒ노컷뉴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전 CBS 동아일보 기자)

“장애인이 되니까 좋은 점도 있네요.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말할 기회가 있으니까요.”

지난 여름 아내(황혜경)가 서울 역삼동 삼성SDS멀티캠퍼스에서 삼성사회봉사단 리더들을 상대로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은 난생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교통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서울시청에서 평범하게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을 아내였습니다. 하지만 이날 아내는 휠체어를 의지한 채 수 백 명의 청중 앞에서 잔잔한 목소리로 자신의 얘기를 풀어나갔습니다.

강연 내용이라야 독일 연수중 영국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 이후 변화된 삶의 모습과 서구 유럽에 비교해 우리사회가 장애인들에게 아직 얼마나 인색하고 상대적으로 불편한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날 아내의 강연 중 한 구절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장애인이 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내는 1998년 6월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뒤 1년 동안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약물에 중독된 사람의 잘못으로 자신이 장애인이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았습니다. 두 달간의 혼수상태와 세 번에 걸친 왼쪽 다리의 절단수술 끝에 아내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깨어나는 순간 평생 혼자 걸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무엇보다 딸아이를 번쩍 안아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고 전 저는 기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언론재단의 2년간 해외연수자로 선발되자 아내에게 독일로 함께 갈 것을 제안했고 귀국에 앞서 영국여행을 강요했습니다. 한국을 떠나기 싫다는 아내를 외국으로 데려와 장애인을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사고이후 나날이 날카로워지는 아내에 대한 걱정, 장애인이 된 엄마를 무서워하게 된 딸아이에 대한 연민 등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내 마음속 분노였습니다. 누구보다 낙천적이고 건강했던 아내를 한순간에 장애인으로 만들었고 우리 가족을 고통 속으로 떨어뜨린 가해자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어려운 순간 마다 그를 원망했고 꿈속에서도 증오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 컴퓨터 회사의 프로그래머였다고 합니다. 평소 편두통을 앓고 있었던 그는 이날따라 많은 양의 두통약을 먹고 운전하다 정신을 잃고, 사고를 냈다고 합니다. 병원 응급실에 혼수상태인 아내를 찾아와 백 배 사죄해도 용서가 될까 말까 한데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8년 동안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 없었습니다.

귀국한 뒤 다행히 아내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책을 소리 내어 읽기도 하고 제가 귀가하면 초등학생 같은 글씨체를 보여주며 많이 나아졌다고 자랑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한 달에 두세 번 환상통이 찾아오는 밤이면 영국으로 가해자를 찾아가 우리 가족이 당한 고통을 되돌려 주고 싶었습니다. 가해자 측 영국 보험회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사고의 고통을 잊을 만하면 피해보상에 필요하다고 각종 서류를 요구했습니다.

아내의 대학 졸업 증명서부터, 만약 사고를 안당하고 복직했을 경우 받을 월급명세서, 최근 심리상태에 대한 소견서까지 매년 업데이트 한 자료를 수없이 요구했습니다. 제가 영국 보험회사에 보낸 서류만 해도 2,000페이지가 넘습니다. 2개월 이상 병원 입원이 안 돼, 아내가 퇴원하면 “집에 있는데 왜 취업을 안 하느냐?”고 다그쳤습니다. 우리 측 국제변호사를 통해 항의하면 “피해보상에 심각한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위협했습니다. 장애인이 취업은 고사하고, 병원 입원하기도 어려운 국내 상황을 설명하면 “OECD국가인 한국에서 그럴 리 없다”며 우리 정부가 발표한 이상한 통계를 제시했습니다. 한순간에 불행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자다가도 분노 때문에 가슴이 벌렁벌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저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미워하지 말아요, 이제 용서할 때가 됐어요”하고 말입니다. “더 이상 그를 미워하다가는 자신과 세상이 미워질 것 같아요”하고 말했습니다. 오랜 시간 ‘왜 나만 장애인이 됐을까?’하고 고통스러워하던 아내는 ‘나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지만 저는 준비가 안 돼 있었습니다. 아니,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저도 가해자와 영국 보험회사, 우리가 사고를 당한 스코틀랜드에 대한 용서를 다짐했지만 아내가 혼자 집안에서 의족과 두개의 지팡이를 짚고 걷는 연습을 하다 넘어져 피를 흘리고, 원하는 단어를 제대로 발음조차 하지 못할 때 피가 거꾸로 솟았습니다. 영원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고통을, 고통의 기억을 잊게 합니다. 가슴에 새겨진 미움도 시간 속에 서서히 사라져갔습니다. 정말 어렵고도 어렵게 가해자와 영국 보험회사를 용서하고 나니 세상이 조금씩 다르게 보였습니다. 자다가 깨어나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영국에서 온 편지를 봐도 피가 거꾸로 솟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몇 개월 뒤 거짓말처럼 영국보험회사로부터 피해보상을 매듭짓자는 제안이 왔습니다. 한 달 간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피해보상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멀고도 먼 여정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변호사로부터 소송을 종결한다는 연락을 받고 아내와 집 근처 공원을 찾았습니다. 5월의 태양이 눈부셨습니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8년 전 스코틀랜드 오지에서 우리가 겪은 사건은 삶의 뿌리가 뽑힐 만한 세찬 태풍이었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고, 이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자”고 말입니다.

용서는 용서를 낳고, 좋은 일은 좋은 일을 낳는 것일까요? 그동안 영국과 소송을 위해 고생해준 법무법인 광장의 안용석, 장우영 변호사는 “살다보니 이런 좋은 날도 오는 군요”하며 우리 부부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수임료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김성수 총장님과 강지원․ 박원순 변호사님 등을 찾아다니며 국내 재활병원의 문제점을 이야기했고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푸르메재단이 건립됐습니다.

지금도 혼수상태에 빠진 아내를 바라보며 눈물지었던 순간들이 생각납니다. 스코틀랜드 오지병원에서 응급실 창 너머로 낮게 드리워진 먹구름과 그 아래를 유영하던 갈매기의 노란 부리까지 선명합니다. 그때가 손에 잡힐 듯 한데 벌써 8년이란 시간이 흘렸습니다. 가끔 아문 상처를 매만지듯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을 되새겨봅니다. 우리 부부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넘어야했던 험한 산과 물보라 치던 강물이 이제 되돌아보니 작은 봉우리와 냇물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애를 끊을 듯 힘들었던 시간도 지나고 나니 감동스런 기억이 중첩돼 지금까지 지나쳐온 많은 오솔길 중 하나처럼 보입니다.

아내가 혼수상태에서 세 번씩 다리 절단수술을 받았던 그 절박했던 순간들이 떠오를 때마다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 유럽에 살고 있는 한인교인들이 한 날 한시에 미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영국 병원에서 아내를 위해 함께 기도했던 영국간호사들, 그리고 아내가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우리부부를 향해 내밀어 준 수많은 따뜻한 손길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우리도 아픔을 겪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습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 아내에게 그렇게 큰 고통을 주시고 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네가 몸소 겪었으니 어려운 환자를 위해 아름다운 병원을 세우라’는 말씀이 아닐까합니다. 아내는 앞으로 세워지게 될 푸르메 병원에서 힘들어하는 환자들을 만나면 “나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그래서 오늘을 맞을 수 있었다”고 말하겠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뜻을 모아서 하루빨리 장애환자를 위한 아름다운 병원이 세워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