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손에 손잡고 한걸음 한걸음, 1236계단 밟고 천지 오르다

손에 손잡고 한걸음 한걸음, 1236계단 밟고 천지 오르다

 2008-09-09
산악인 엄홍길-‘말아톤’ 배형진 씨, 장애청소년 8명과 백두산 트레킹

“천천히, 천천히….”

5일 오후 산악인 엄홍길(48) 대장과 ‘백만 불짜리 다리’를 가진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배형진(26) 씨는 김소연(14) 양의 두 손을 각각 쥐고 계단을 오르며 이렇게 구호를 외쳤다. 110cm의 키로 지체장애를 앓고 있는 김 양의 걸음에 속도를 맞추기 위한 것.

8명의 장애청소년과 푸르메재단, 외환은행 직원 등 일행 30여 명은 모두 1236개의 계단을 밟고 백두산 천지를 보기 위해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맑고 투명한 천지의 장관이 펼쳐진 순간 엄 대장은 “여러분의 염원으로 천지가 보입니다”라고 외쳤고 일행들은 환호했다. 엄 대장은 “백두산 천지는 날씨가 좋지 않아 구경하기 어렵다”며 “세 번 백두산에 오고서야 천지를 보게 됐다”고 말했다.

정호승(58) 시인은 19년 전 자신이 백두산에 올랐을 때 쓴 시 ‘백두산’을 낭독했다.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우리의 사랑이 언젠가 다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두만강을 건너 묘향산을 지나 백두산은 한라산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고 낭송한 정 시인은 “천지를 봤을 때 항아리에 고인 물로 여겨져서 이 물이 제주도까지 가면 남과 북이 하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시를 썼다”고 회고했다.

외환은행과 푸르메재단이 주최한 ‘장애청소년과 엄홍길 대장이 함께하는 백두산 트레킹’은 중국 랴오닝() 성, 지린() 성 등지에서 4일부터 7일까지 3박 4일간 백두산 등반, 고구려 문화유산 답사 등의 일정으로 진행됐다. 이번 행사에는 장애청소년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시련을 이겨낸 인사들이 동행했다.

엄 대장은 “38번이나 8000m 이상 높이의 산에 도전해 18번을 실패하고 동료 10명을 잃었다”며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했다. 자폐증을 앓으면서도 국내 최연소로 철인 3종 경기를 완주했던 배형진 씨는 청소년들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의수화가 석창우(53) 화백은 두 팔 없이 의수로 붓을 쥐고 인물의 생생한 움직임을 포착해 누드크로키를 그리는 화가. 석 화백은 산 위에서 퍼포먼스를 벌이며 누드크로키로 일행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자원봉사를 맡은 외환은행 나눔재단 이충원 사무국장은 “순수한 마음을 느끼고 오히려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배형진 씨의 어머니 박미경(49) 씨는 “형진이를 키우며 내가 배우고 느낀 것은 인내였다”며 “이번 행사가 스스로를 돌보는 치유의 과정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백두산=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