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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조금 더뎌도 함께걸음 천지 푸른물 품었어요

조금 더뎌도 함께걸음 천지 푸른물 품었어요

장애인 아이들의 백두산 등정기

2008-09-09

» 지난 5일 오후 백두산 천지로 향하는 돌계단에서 지체장애를 앓는 김소연(14)양이 산악인 엄홍길(48)씨와 영화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 배형진(27)씨의 도움을 받으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상단 작은 사진은 백두산 천지에 도착한 장애청소년들과 등반대가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

지체·시각장애 8명
엄홍길 산악대장과
1236개 돌계단 ‘완보’

“누가 먼저 앞서고 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다 함께 가는 겁니다.”

 “네!”

 우렁찬 아이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지난 5일 오후 백두산 천지로 향하는 1236개 돌계단 앞에 선 산악인 엄홍길(48)씨 뒤로 연둣빛 등산복을 맞춰 입은 30여명이 손을 맞잡고 섰다. 엄씨의 당부 말에 손을 번쩍 들며 답한 김규범(14)군은 시각장애와 오른쪽 다리가 짧은 지체장애가 있다. 김군은 거의 보이지 않는 눈을 바닥에 고정한 채 뒤뚱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천지를 볼 수 있어 너무 기쁘다”며 안경을 추켜올린 김소연(14)양도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의 한 재활원에서 생활하는 김양은 지체장애 탓에 키가 1m 남짓밖에 안 된다. 김양은 등반 도우미 김온실씨의 손을 꼭 잡은 채 ‘짧은 다리’를 분주히 옮기며 천지로 향했다.

 이날 백두산 등반은 민간 재활전문병원 건립을 추진하는 푸르메재단과 외환은행 나눔재단이 서울의 중·고등학교 특수학급과 특수학교에 다니는 장애 청소년 8명을 초청해 이뤄졌다. 이번 등반에는 푸르메재단과 외환은행 직원 등 20여명이 등반 도우미로 나섰고, 영화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 배형진(27)씨도 동행했다. 든든한 등반대장을 만난 덕분인지, 아이들은 비장애인도 금세 숨이 차는 돌계단을 오르면서도 내내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다.

 “우…리가 이겼다!”

 마침내 아이들의 목소리가 천지에 울려 퍼졌다. 백두산 중턱을 출발해 꼬박 1시간 만에 천지에 도착한 아이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궂은 날씨로 유명한 천지도 이날은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며 아이들을 반겼다.

 “그러나 그날 새벽 먼동이 틀 무렵, 백두산은 휴전선 앞에서 울고 있었다. 하늘 끝도 갈라진 휴전선을 뛰어넘다가 무릎을 꺾고 쓰러지고 말았다. 천지의 물은 그대로 쏟아져 평양과 서울을 휩쓸고 지나갔다.”

 함께 등반한 정호승 시인이 천지를 등진 채 자신의 시 <백두산>을 낭송했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시인의 낭송을 지켜봤다. 의수 화가인 석창우 화백은 아이들의 모습을 화선지에 담은 뒤, 정씨의 시를 써 넣은 멋진 시화를 그렸다.

이날 저녁 숙소로 돌아온 8명의 장애 청소년들은 ‘임시 학생회’를 열어 나흘간의 긴 여정을 돌이키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천지를 오르며 ‘함께 가는 법’을 배운 이들은 이미 한없이 넓은 백두산 천지를 가슴속에 품은 듯했다.

 백두산/글·사진 김성환기자 hwan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