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원수같은 통증 딛고 완주, 베를린의 의족 영웅

원수같은 통증 딛고 완주…베를린의 의족 영웅


마라톤 참가 장애인 
김형배 씨

이 악물고 5시간41분05초 골인

《1983년 6월 5사단 근무 중 비무장지대 작전에 나갔다가 폭풍지뢰를 밟아 왼쪽 무릎 밑이 없는 김형배(49·부산교통공사) 씨는 의족을 착용하기 전 다리 부분을 실리콘으로 둘둘 말았다. 그리고 의족과 닿는 부분이 아프지는 않은지 가볍게 뛰어 보았다. 그리고서야 출발선으로 갔다. 》

28일 독일 베를린 시내에서 열린 2008 베를린 마라톤. 재활전문병원 건립을 추진하는 푸르메재단의 ‘장애인 희망 프로젝트’에 따라 참가한 김 씨는 이날 천당과 지옥을 모두 경험했다.

독일 국회의사당 뒤 광장을 출발해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들어오는 베를린 코스는 환상이었다. 표고 차가 작고 도로변엔 나무가 늘어서 숲 속을 뛰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3, 4세 어린이부터 나이 지긋한 노인들까지 박수를 치며 응원했다.

김 씨는 “참 아이들이 귀엽네”라며 어린이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했다. 곳곳에서 악단들이 연주를 할 땐 갈채와 환호성을 터뜨렸다. 마치 초등학생이 소풍 나온 듯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20km를 넘어서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몸무게의 두세 배 충격이 계속되자 의족과 맞닿은 살이 견뎌내질 못했다. 보통 10km를 넘으면 물집이 잡히고 피까지 흐르는데 이날은 그나마 오래 버틴 것이었다.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탁, 탁, 탁’ 가볍게 달리던 왼쪽 의족은 ‘직, 직’ 끌리며 따라가고 있었다.

29km에 이르자 그는 “아, 죽고 싶다”고 했다. 아픔은 온 몸으로 퍼져 전신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으로 이어졌다. 주위의 모든 아름다운 것이 한순간 “원수같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래도 그는 이를 더욱 악물었다. 하프 코스는 2시간30분에 끊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3시간10분이 넘는 ‘통증과의 투쟁’이었다. 하지만 포기는 없었다. 부산 초량역 부역장으로서, 아빠로서 결승선에서 기다리는 아들 세익(다대포 몰운초 5) 군을 실망시키기 싫었다. “힘들면 걸으면서 가죠”라는 기자의 권유에 “괜찮아요”라며 줄기차게 달렸다.

5시간41분05초. 결승선을 통과한 그는 아들을 껴안으며 비로소 웃음을 띠었다. 출발 전에 “1등 해야 해”라던 세익 군은 “아빠, 들어와서 너무 좋아”라며 김 씨의 품에 안겼다.

김 씨의 이날 레이스는 한계 그 이상의 도전이었다. 이날 사용한 의족은 평상 시 쓰는 것. J 모양의 첨단 레이스 의족은 탄소섬유로 제작돼 무릎과 엉덩이 충격을 흡수하고 탄력도 있지만 너무 비싸 살 엄두도 못 냈다. 의사도 “위험하다”고 말린 레이스였다. 게다가 13시간 비행기를 타고 와 이틀 만에 105리를 뛰는 강행군이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들과 장애인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는 푸르메재단을 위해 온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