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백경학 상임이사 “유럽 못지않은, 환자를 위한 병원 짓겠다”

연수때 여행중 사고로 아내 왼쪽다리 잃어
귀국 이후 국내 병원의 열악한 현실 보고 절망
착공비 10%만 확보…기금마련 다양한 방법 모색

몇년 전, 지인들과 서울 종로의 한 하우스 맥주 전문점을 찾은 적이 있다. 맥주를 주문하면 1000원에 요리를 제공해 준다는 행사 벽보를 본 누군가의 제안에서였다. 행사 수익금은 기부금으로 쓰인다는 글귀도 보았지만 크게 기억에 남지 않는다. 당시 한창 인기 있던 TV 프로그램 제목과도 비슷한 ‘천원의 만찬’이라는 행사였다. 그저 마케팅을 위한 업체의 의례적인 선행쯤으로 생각했다. 이후에도 모임이나 지인과 약속이 있을 때 종종 그곳을 찾았지만 ‘맥주 맛이 좋은 곳’이 기자가 가진 정보의 전부다. 지난 24일 백경학(46) 푸르메재단 상임이사를 만났다. 장애인 재활전문병원을 지으려고 재단을 만든 지 5년 만인 내년 5월 병원 건립의 첫삽을 뜨기 위해 한창 분주한 그의 소회를 듣기 위해서였다. 예상을 깨고 백 이사는 맥주 얘기부터 꺼냈다. 그것도 기자가 가끔 갔던 그 맥주 전문점 얘기였다. 알고 보니 그 전문점을 공동 창업한 것도, 천원의 만찬을 기획한 것도 모두 그였다.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이사는 “치료와 간병, 훈련 일체를 병원에서 책임지고 환자 가족은 생계에
전념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맥주 전문점 창업자’와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언뜻 보면 양복에 두루마기를 걸친 것만큼이나 어색해 보이는 조합이다. 그에게는 주어진 삶에서 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고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때 그 사고’가 없었더라면 지금 이 꿈을 꾸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가 말한 ‘그 사고’는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맥주 사업가와 비영리재단 상임이사라는 직함을 갖기 이전에 그는 기자와 같은 직업에 종사했다. 기자 세계에서 자조적으로 얘기하는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하루 열심히 일해 다음날 신문을 만들고 다음날 또 일해 그 다음날 신문을 만드는 그런 삶이었다. 1996년 독일 통일문제를 공부하러 독일로 연수를 떠날 때만 하더라도 기자 외 다른 길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의 삶이 송두리째 뒤바뀐 건 1998년 6월 2년 연수를 마치고 귀국을 앞둔 시점이었다. 그는 귀국 전에 가족에게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번영을 누린 영국을 보여주기 위해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 설렘 속에 떠난 여행이 가족에게 안겨준 건 추억도, 선물도 아닌 불행과 절망이었다.

여행 막바지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막 향하려던 길이었다. 2차선 산길을 운전하다 6살짜리 딸아이 속옷을 갈아입히러 잠시 차를 세운 채 아내가 트렁크를 여는 순간 어디선가 차 한 대가 나타났다. 시야가 훤히 보이는 오르막길에 비상등까지 켜둔 상황이었는데, 이 차는 무서운 속도로 차로 돌진해 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달려온 차량 아래 깔려 있었다. 아내는 피를 흥건히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그렇게 쓰러진 아내는 몇 차례 수술과 몇 개월 혼수상태를 거듭한 끝에 깨어났지만 왼쪽 다리를 잃었다.

영국과 독일에서 1년 반의 재활치료를 통해 아내의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자 그는 귀국했다. 귀국을 후회하기까지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아내의 재활치료를 위해 찾은 국내 병원 상황이 너무 열악했다. 병실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고 어렵게 구한 병실도 두 달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그는 “우리가 영국과 독일에서 경험한 병원이 특급호텔이라면 한국 병원은 여인숙 수준이었다”고 회상했다. 국내 병원의 열악한 현실은 그에게 외국과 같은 그런 병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심어줬다. 뜻 있는 사람들을 모으면 자기가 생각하는 그런 병원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병원을 지으려면 병원 부지, 건립비 등을 갖춘 의료법인을 만들어야 한다. 기자생활과 연수를 한 그가 의욕만으로 당장 의료법인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의료법인 전 단계로 재단법인을 만들기로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변신’했다. 독일에서 맥주 양조학을 전공한 후배와 경제부 기자 후배에게 맥주 전문점을 내자고 부추겼다. 그렇게 2001년 10년 넘게 이어온 기자생활을 접었다.

그는 “기자 월급만으로 350만원 하는 아내 병원비를 대기도 힘들었다”며 “주변에서 걱정도 많았지만 가능성을 믿어준 지인 58명이 5000만원씩을 걷어 29억원을 만들어줘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한 맥주 전문점은 성공이었다. 그는 사업 지분과 가해자 측 보험회사에서 지급한 ‘우선피해보상금’ 1억원을 몽땅 털어 2005년 장애인 재활병원 건립을 위한 푸르메재단을 창립했다. 이듬해에는 8년간 소송 끝에 받아낸 피해 보상금 107만5000파운드(약 20억원) 중 절반을 재단에 보탰다.

재단 설립취지에 공감한 시민과 각계 지원이 이어지면서 재단은 내년 5월 역사적인 첫삽을 뜨게 된다.

부지 확보에 애를 먹던 지난해 11월 경기도 화성시가 3만8057㎡ 부지를 제공하겠다고 밝히면서 사업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병원전문설계사무소 ‘간삼 파트너스’가 사회공원차원에서 설계비의 절반만 받고 설계해 주겠다고 나서 병원 건립이 조금 더 수월해졌다.

그렇더라도 착공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그가 요즘 여기저기 도움을 찾아 나서는 이유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캠페인을 벌이는 등 기금마련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150 병상을 갖춘 병원을 지으려면 한 병상당 2억원가량 잡아 350억원가량이 든다”며 “많은 분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줬지만 아직 10% 정도밖에 못 모았다”고 말했다.

예정대로 된다면 내년 착공해 2012년 초 개원하는 이 병원에는 병원운영과 환자치료에 대한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다.

“첫째는 환자가 주인인 병원, 둘째는 치료와 간병, 훈련 일체를 병원에서 책임지고 환자 가족은 생계에 전념할 수 있는 병원, 셋째는 시민 기금과 지자체, 기업의 경영 보전으로 가난한 사람도 누구나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 넷째는 유리알처럼 투명한 경영을 하는 병원이어야 합니다. 환자 부름에 응답하는 환자를 위한 병원을 만드는 거죠.”

한순간 사고로 삶의 궤도가 크게 바뀌었지만 그는 지금 삶에 감사할 뿐이라고 한다. 그는 “사고를 겪기 전까진 장애는 남의 문제라고 생각했고 나에게만 불행이 찾아온 것 같아 원망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누구나 사고·질병으로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이들이 편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재활병원을 만들어 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싶습니다”라는 그의 말에 힘이 배어 있었다. (후원 문의 :푸르메재단 02-720-7002, www.purme.org)

이태영 기자 wooahan@segye.com

2009년 7월 27일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