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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재활병원 짓기 위한 ‘주교님의 앵벌이’

재활병원 짓기 위한 ‘주교님의 앵벌이’

 

월남하신 부모님은 우리 형제에게 내복을 입지 못하게 하셨다. 고향인 평안도에 비하면 서울의 겨울은 봄 날씨라며 이런 겨울을 못 이기고 벌벌 떨면서 어떻게 남한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고 호통을 치셨다. 그렇게 단련되어서인지 나는 남보다 추위를 덜 탄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는 폭염의 햇살에 비해 겨울 칼바람을 오히려 좋아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겨울바람이 마냥 반갑지는 않다. 내가 일하는 푸르메재단에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장애어린이를 위해 푸르메어린이재활센터를 운영하는데 날씨가 추워지면서 진료를 받으러 오는 어린이들이 전보다 훨씬 힘들어 보인다. 손이 많이 가는 장애아이다 보니 갈아입힐 옷과 기저귀, 담요까지 챙겨야 할 물건이 작은 이삿짐만큼 된다.

멀리 강원도 홍천에서 진료를 받으러 오는 어린이가 있다. 새벽 6시 집을 출발해 재단에 도착하면 30분 진료를 받고 같은 길을 되짚어 3시간을 돌아간다. 부모는 잠든 아이를 차에 태우고 1주일에 두 번 홍천에서 서울까지 오간다. 아버지는 직장에 양해를 구해 1주일에 두 번, 오전 근무를 쉬는 대신 휴일에 대체 근무를 한다. 꽝꽝 얼어붙은 캄캄한 겨울 새벽길을 달리는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아이 부모님의 절박한 마음을 관련부처 공무원과 정치인은 과연 얼마나 알까? 어느 지자체에서는 청사 건립에 3000억 원을 쓰고, 그 때문에 올해 예산을 크게 줄였다고 한다. 그럴 때 만만한 게 사회복지예산이다. 정부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기업의 사회공헌기금도 줄고 있다.

푸르메재단에서는 재활전문병원 건립기금을 모으기 위해 정부와 기업의 문을 두드린다. 워낙에 바쁜 분들이라 만나기도 쉽지 않지만 어렵사리 찾아가도 돌아오는 건 매끄럽고 우아한 거절뿐이다. 그럴 때면 재단 이사장이신 김성수 성공회 주교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에 기금을 부탁하러 갔다 거절당하자 “부자가 자기 돈 내놓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려운 사람을 생각해서 두드리고 두드려야 합니다”라고 오히려 나를 위로하셨다. 지적장애인을 위한 학교와 생활공동체를 짓고 월급조차 나누어주시고 계신 주교님의 말씀을 잊지 못한다.

기업 대표에게 거듭 고개를 숙이며 기금을 요청하셨던 주교님은 자신의 모습을 ‘공익을 위한 앵벌이’라고 농담했다. 아마 기업에 손을 내미는 반갑지 않은 손님을 앵벌이로 의식하신 말씀이리라.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