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경향]  강지원·김영란 부부 “이웃들이 더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보탬이

삶의 귀감이 되는 ‘참 어른’을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 바람직한 사회지도층의 행보를 보여주는 부부가 있다. 매일 조금씩 더 나아지는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동분서주하는 강지원 변호사와 이 세상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넉넉한 품을 가진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김영란 위원장의 모습에서 내일의 희망을 찾아본다.

다시 쓰는 ‘성공’의 의미
각자 삶의 방식에 따라 ‘성공’이란 단어의 정의는 다르게 쓰이겠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공’의 개념에 비추어본다면 이 부부만큼 성공한 경우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남편 강지원 변호사(62)는 경기고·서울대를 졸업하고 제12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사무관 생활을 하던 중, 1976년 제18회 사법고시에 수석 합격하며 화제를 모은 인물이다.

이후 30년 가까이 검사의 길을 걸어왔고 사법연수원 교수, 초대 청소년위원회 보호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2003년 검사직 퇴임 이후에는 청소년 인권 변호사로 청소년들의 삶을 희망으로 물들이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한국매니페스토 실천본부 상임대표, 대통령소속 사회통합위원회 지역분과위원장, 자살예방대책 추진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지난 1월 1일부터 새로이 중책을 맡아 다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김영란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55) 또한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최고의 자리를 거쳐왔다. 서울대 법대 4학년 재학 중 제20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사법연수원 수료와 동시에 판사로 임용돼 30여 년을 법조인으로 살아왔다. 동기 중 최초로 부장판사로 진급했으며, 특히 2004년 헌정 사상 첫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되며 더욱 크게 알려졌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48세. 사법 역사상 40대 대법관이 탄생한 것은 16년 만의 일이고, 그것도 사법연수원 기수에 따른 연공서열을 10년 이상 뛰어넘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리고 지난해 8월 ‘소수자를 위한 법치주의의 확대’라는 법조인으로서의 신념을 실천해온 대법원 임기 6년을 마무리했다. 이외에도 그녀는 지금껏 각종 ‘최초’라는 접두사의 주인공으로 세상의 이목을 끌어왔다.

‘성공’한 사람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 세상 탓일까. 김 위원장 대법관 퇴임에 맞춰 당분간은 차분히 어제를 둘러보고 내일을 설계하고자 마음먹었던 부부는 최근 다시 정신없는 일상으로 돌아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강지원 변호사는 지난해 11월부터 YTN 라디오 ‘출발 새아침’ 진행을 맡아 매일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청취자들에게 사회 각 분야의 소식을 전달하는 중이다.

2004년, 자신이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정치적 중립과 공정성이 생명’인 아내의 대법관직 수행에 혹시나 피해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의를 표한 후 6년 만에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을 위해 강 변호사는 매일 꼭두새벽부터 집을 나서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뉴스는 물론 요일별로 전문적인 현안을 심도 있게 분석해내야 하는 터라 품이 여간 많이 드는 것이 아니다.

법관 생활을 마감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며 천천히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는 바람을 밝혔던 김영란 전 대법관 또한 지난 연말 단행된 부분 개각에 따라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이름으로 공직에 복귀하게 됐다. ‘판단하고 처벌하는 일을 하는 판사로서 얼마나 힘든 사람들을 위로해주었는지, 얼마나 슬픈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었는지, 얼마나 답답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는지 항상 자문해왔다’는 김 위원장은 퇴임사에서 ‘늘 무겁기만 했던 그 칼’을 반납하고 세상으로 나가며 “30년 가까운 법관의 경험을 살려 세상에 기여하고 봉사할 수 있는 새 길을 찾아보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첫걸음을 국민권익위원회에서 떼게 된 것이다.

LADY 실로 오랜만에 정해진 울타리에서 벗어나 부부가 마음 편히 지내시게 되려나보다 생각했었는데, 어떻게 보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신 것 같아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김영란 퇴임 후 몇 달 동안 식구들과 시간도 많이 보내고, 보고 싶던 책도 실컷 보고, 운동도 하면서 여유를 부렸는데 결국 다시 시간 맞춰 출퇴근하는 생활을 하게 됐어요. 판사 생활 할 때는 아침에 출근해서 오전 내내 기록에 묻혀 있다가 점심 먹고 또 기록을 읽다 하루를 마감했는데, 국민권익위원회에서는 사무실 밖의 일이 더 많다는 것이 다른 점이에요. 국회에도 가봐야 하고, 회의도 많고, 현장에 나가 민원 해결도 해야 하고, 각종 대내외 행사도 많고요. 종일 움직이다보면 어느새 저녁이에요.

강지원 저도 지난해 변호사 사무실도 없애고 잠시 자유인 생활을 만끽할 마음을 먹었는데 한편으로 또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들이 많더라고요. 청소년 문제뿐 아니라 각종 ‘사회 운동가’로서 뛰어다녀야 할 일들도 많고요. 아내도 저도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매인 몸’이 되어버려서 사실 좀 안타까워요.

LADY 김 위원장님의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임명 소식은 좀 의외였습니다. 제의가 들어왔을 때 고사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강 변호사님과도 의논을 하셨는지요?

김영란 처음에는 저도 위원장 내정 제의에 닷새 동안 사양의 뜻을 전했어요. 행정 경험도, 기관장 경험도 없는데다 평생 재판만 해온 제가 과연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고 그동안 못했던 일을 하며 자유도 누리고 싶었고요. 제게 소수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제3자적 입장에서 업무를 크로스 체크하는 역할을 기대한 것 같아요. 나중에는 도저히 거절을 못하겠더라고요.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어려운 민원을 해결해주고, 공직사회 부패 예방 및 교육 정책을 만드는 업무가 제가 30여 년 동안 해왔던 일과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일반 행정 업무를 집행하는 곳이 아니라 일종의 행정부 감시 기능을 하는 독립적인 기관이라는 점에서는 사법부에서의 판사 역할과 맞닿아 있기도 하고요.

강지원 저도 처음에는 아내가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마음 편히 지냈으면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래도 능력이 된다면 공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옳다싶어서 적극적으로 봉사하라고 했어요. 아직 한창 일을 더 해도 될 나이기도 하고, 가진 능력이 있다면 사회 발전을 위해 발휘해야 한다고 보거든요.

LADY 그렇다면 강 변호사님은 위원장 역할에 도움을 많이 주셔야 하겠어요. 김 위원장님이 수많은 ‘첫’ 기록을 보유하고 있지만, 독립관청의 기관장 역할은 처음이라 어려운 점이 있으실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김영란 국민권익위원회에 접수되는 민원은 행정부에서의 일반적인 고충처리 업무로는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가 많아요. 그것을 공정하고 명쾌하게 해결하기란 쉽지가 않죠. 하지만 적어도 민원인이 ‘억울하다’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그 마음까지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예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부패 수준은 아직 심각한 편이에요. 눈에 드러나는 ‘하드 케이스’는 줄어들었지만 보이지 않는 구조적 부패는 여전하거든요. 특히 이런 쪽은 단시간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적 변화 또한 함께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에 제도에 의한 획기적인 개선을 꾀하기보다 서서히 토대를 닦아나가려 하고 있어요.

 

강지원
아무래도 김 위원장은 사법부에서 오래 일하던 사람이라 다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 있을 거예요. 아예 문화가 다르니까요.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잘해낼까’ 걱정해주는 것 정도죠. 그래도 제가 사회활동하면서 겪은 이야기나 경험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해서 그런 부분이라도 열심히 도우려고 해요.

LADY 얼마 전, 김 위원장님의 부친상 소식이 뒤늦게 알려지며 ‘공직자의 귀감’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셨죠. 해외 출장 중 비보를 접하고도 공무를 끝마치고 나서야 빈소를 찾으셨다면서요. 심지어 주변에 알리지도 않은 채 장례를 치렀다고 하던데요(부부는 가족과 권익위원회에 외부로 소식을 알리지 말라는 요청과 함께 장례식장 입구에 공개된 상주 명단에서도 이름을 뺐다고 한다. 출장에 동행했던 대부분의 직원들과 지인들조차 이 사실을 몰랐을 정도. 김 위원장은 회의 및 면담 자리에서는 슬픔을 내색하지 않은 채 최대한 담담히 모든 일정을 소화한 뒤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빈소로 달려가 마지막 밤을 지켰다. 이 부부는 2004년 강지원 변호사 모친상 때도 가족들끼리만 간소하게 장례를 치른 바 있다).

김영란 위원회 업무로 미국에 머물고 있던 중 연락을 받았어요. 국가 업무를 수행하러 간 상황에서 개인적인 일로 약속된 회담을 취소할 수는 없어서 그렇게 했어요. 주변에 알리지 말라고 했던 것도 어차피 저는 미국에 있어서 문상객을 맞을 형편도 못 됐거니와 평소에 남편과 저는 그런 혼·상례에 있어서는 가까운 사람들 중심으로 간소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거든요. 신분이 공직자이기도 하고요. 언니나 동생, 형부 등 다른 가족들도 흔쾌히 동의해줘서 저희 뜻대로 할 수 있었죠.

강지원 2001년이었나, 지나치게 체면을 앞세운 우리 혼·상례 문화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 ‘아름다운 혼·상례를 위한 사회지도층 100인 선언’이라는 게 있었어요. 그때 그 운동에 참여하면서 공감을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실천으로 옮기기고 있는 것뿐이에요.

김영란 정말 조용히 치르고 싶었는데, 발인하는 날에 위원회 국회 출석 일정이 잡혀서 저 대신 다른 분이 가시는 바람에 알려지게 됐어요. 이렇게까지 회자될 거라곤 정말 생각도 못 했어요. 알리지 말자고 했던 게 오히려 더 알려져버려서 굉장히 난감하네요.

강지원 경조사 때 사람이 많이 몰리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문화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지위를 이용해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았고요.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더군요.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가는 길에는 내려놓고 떠나잖아요. 마음 아픈 일에 자식들이 괜히 ‘떵떵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다름’에 대한 인정
30년 가까이 법조인의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은, 같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궤적을 그려왔다. 지금보다 훨씬 적은 수의 합격자를 뽑던 그 시절 사법고시 수석 합격을 차지하며 검사생활을 시작한 강지원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교수, 청소년보호위원장, 법무연수원 교수, 푸르메재단 대표 등 수많은 직함을 가졌었다. 하지만 정작 모두가 예상했던 검사장, 지청장, 검찰총장 등을 맡아본 적은 없다. 만약 본인이 원했다면 쉽게 탄탄대로 출세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기들이 대부분 승진해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법조인으로 승승장구할 때 강 변호사는 요직을 뒤로하고 봉사의 기회가 주어지는 자리에만 머물러왔다. 방송에 출연하고 각종 사회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모두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목표에 부합하는 선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그의 신념을 믿고 묵묵히 지지해준 아내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대법관 퇴임사에서 “법원은 제가 몸담은유일한 직장이었고 사회였다. 그 중에서도 대법원은 재판연구관과 대법관으로 11년 일하며 법관생활의 4할 가까이를 보낸 곳이었다”라고 밝히며 남다른 애정을 드러낸 바 있는 김영란 위원장은 오랜 시간 동안 다른 데 눈 돌리지 않고 오직 한 방향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내내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확대하는 데 법이 올바르게 쓰일 수 있도록 애썼다. 사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사회 ‘주류’인 그녀가 그렇게 지속적으로 ‘소수’를 위해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그녀 또한 ‘소수자’인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수식하는 각종 ‘최초의 여성’이라는 타이틀 앞에서 당당하고 의연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김 위원장은 소신껏 일에 전념할 수 있었던 데는 남편의 이해가 숨어 있었다고 말한다.

 

LADY 김 위원장님은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의 최초 여성 대법관으로 주목을 무척 많이 받았었는데요. 존재 자체로 상징하는 부분이 많았지요. 대법원을 떠나고 나서 아쉬운 점은 없었습니까?

 

김영란 제가 대법원에 들어가서 ‘여성’에 국한되기보다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념을 전파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뿌듯한 일이에요. 다만 아쉬운 점은 제 행보가 주목을 받고, 법조계는 물론 사회 각 분야에 여성 파워가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성적으로 진출하는 분야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진정한 여성의 사회 진출은 답보 상태에 있다고 생각해요. 두드러진 몇몇 모습만 부각되면서 여성을 위한 사회적 장(場)이 펼쳐진 것처럼 착시 효과를 일으키게 될까봐 걱정이 되기도 해요.
LADY 남성 중심 문화에서 여성이 여성으로서 요구되는 전통적인 역할 위에 사회적인 전문성을 더하기란 쉽지 않죠. 김 위원장님도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으로서 힘든 점이 있었나요?

김영란 여성이 사회 진출을 하는 초기에는 ‘동화주의 모델’을 따르게 돼요. 남자들과 똑같아지려고 애쓰는 거죠. 여성적으로 보이지 않으려 하고 더욱 공격적으로 행동한다든지 하는 거죠. 하지만 평등한 문화가 확산된 사회일수록 여성성이라든가 남성성은 개인의 ‘퍼스널리티’로 취급되죠. 남자들 중에서도 ‘여성성’을 가진 경우가 많잖아요. 각자의 개성과 스타일을 살려 일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 같아요. 개인의 특성, 자질, 능력으로 평가받는 사회가 발전된 사회라고 생각해요.

늘 여자가 한두 명밖에 없는 환경에서 일해온 저도 처음에는 그랬던 것 같아요. 게다가 여성이 극히 소수니까 오히려 불이익을 받기보다는 무조건 보호되어야 하는 대상으로만 인식됐었죠. 예를 들어 판사는 지방 교류 근무를 하는데, 여자 판사는 지방 근무를 안 시키는 거예요. 제가 경기도 바깥으로 나간 최초의 여자 판사였어요. 그런 식으로 초반에는 보호를 받았지만 그 때문에 제 개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다수’에 저를 맞추려고 노력했고요. 너무 남성적인 것도, 너무 여성적인 것도 아닌 그 교집합의 범위 안에서만 행동하려다 보니 자신의 자질을 끌어내는 데는 미숙했어요. 구성원 모두가 성별과 같은 상징적 지위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소질과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때 좋은 성과가 나오는 건데, 어떻게 보면 저는 그 진입 단계에서 그만둔 게 아닌가 싶어요.

강지원 이 이야기는 지금 젊은 세대들이 주의 깊게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김 위원장이 소속된 세계는 그래도 의식적으로나마 균형성을 견지하려 하는 편이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일터에서 여성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은 현실일 겁니다. 결혼, 출산, 육아와 같은 문제가 맞물리면 문제가 심각해지죠.

김영란 저 또한 심각하게 사직을 고려한 적이 있을 만큼 가정과 일 사이를 오가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결혼한 여성이 일터에서 자기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부분이 많아요. 능력을 나눠 써야 하니까요. ‘슈퍼우먼’은 존재할 수 없어요. 결국 어느 한쪽이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는데 제 경우에는 가정이, 가족이 어느 정도 희생해준 거죠.

그런 면에서 사회적으로 제도와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우리 사회는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과잉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부분만 절제해도 훨씬 나을 거예요. 우선 문화와 인식이 바뀌어야 하고 또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죠. 저는 여자 후배들을 만나면 “여자 판사 수가 늘어나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활발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영향력 있는 의사결정을 하는 상위 그룹에는 충분히 진출해 있지 않기 때문에 후배들을 위해서 혹은 다른 여성들을 위해서라도 더욱 치열하게 ‘메이저리티’에 진입해야 한다”고 말해요. 호주 등에서는 여성 법조인 수가 늘어나면서 양육 및 교육의 부담을 더는 각종 지원책이 생겨났다고 해요.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정책 변화도 이끌어냈고요.

강지원 이제는 일과 가정 양립의 새로운 모델을 개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아주 획기적으로요. 특히 육아에 있어서는요. 우리 세대는 부모 세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고, 또 사회 환경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에 어떻게든 꾸려올 수 있었지만 지금 젊은 세대들은 문제가 심각하죠. 무조건 여성들에게 열심히 하라고 독려하거나 능력을 키우라고 닦달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프랑스처럼 획기적인 정책 변화가 필요할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의무 보육제’와 같은 것을
주장하는데, 특히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육아와 교육에 관한 지혜를 짜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앞으로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늘어나겠죠. 아직도 사회 전체가 남성 중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적인 감각과 역량을 필요로 하는 면이 많으니까요. 저는 이 전환기를 능동적으로 수용해서 양성적인 사회로 발전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LADY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두 분은 생각하는 방식이나 가치관, 사회에 대한 인식과 방향성까지도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각자의 영역에서 소신껏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내재적인 지지와 믿음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강지원 사실 가정에서부터 좀 전에 이야기한 ‘양성 사회’ 확립이 이루어져야 해요. 그러려면 일단 남성들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데요. 무엇보다 남자들이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지배적 욕구를 포기하는 훈련을 해야 해요. 이제는 그렇지 않으면 ‘쫓겨나는 시대’가 되었거든요. 저 또한 끊임없이 그 욕구를 포기하는 노력으로 점철되어온 인생이죠(웃음). 남자들은 좌뇌적 사고를 많이 하는데다 그동안 남성주의적 한국사회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상대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를 포기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게 쉽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건 앞으로 부부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에요. 대신 여성들은 남자들이 지배적 욕구를 버리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아줬으면 해요. 그걸 당연한 것처럼 치부해버리면 갈등이 생기는거죠.

김영란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똑같아요. 인간에게는 누구나 본능적으로 지배적 욕구가 있거든요. 돈, 권력을 좇는 것도 그 때문이죠. 그게 젊었을 때는 참 쉽지가 않은데, 점점 나이가 들면서 ‘지배적 욕구를 포기해가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구나’를 깨닫게 돼요. 욕심도 버리게 되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싸울 일도 줄어들더라고요.

 

LADY 두 분 함께 계실 때 서로 쳐다보면서 자꾸만 웃으시는 걸 보면 여간해선 싸우지 않으실 것 같은데(웃음). 판검사 부부는 어떻게 싸우는지 궁금해지는데요.

김영란 결혼 초반에는 우리도 싸움 엄청나게 했죠. 가끔 판결문 들먹이면서 싸우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당연히 그렇진 않고요. 집요하게 따지고 드는 편이긴 했어요. 그런데 사실 부부 싸움이 집안일이나 작은 대화에서부터 비롯되잖아요. 판결을 내릴 것도 아닌데 논리적으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죠.

강지원 그런데 처음에 그렇게 싸우다 보면 각자의 모습을 보게 되고 인정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결혼식 주례를 할 때 ‘젊었을 때 열심히 싸워라’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싸우면서 풀어가는 방법을 연구하라고요. 그게 점차 익숙해지면 싸움도 잘 소화가 될 거예요. 사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생활을 같이하면 싸울 일이 생기는 건 당연해요. 싸워가며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법을 배우는 거죠.

김영란 부부 사이는 물론 자녀를 키울 때나 사회생활을 할 때도 ‘서로 다르다’라는 걸 인정해 나가는 과정이 핵심인 것 같아요. 우리는 지나치게 획일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편이라 ‘다름’을 잘 인정하지 못해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전형적인 기준이 있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맞춰가며 살았잖아요. ‘다름’에 대해 인정은커녕, 가만히 두고 보는 것조차 못하는 문화였죠. 하지만 이제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오히려 독려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 같아요.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욕심 없이 진실되게
강지원·김영란 부부의 인터뷰는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강남 한복판 ‘노른자위 땅’에 위치한 것도, 그렇다고 서울 근교 고급 전원주택도 아닌 이 아파트가 첫눈에 마음에 든 부부는 20년간 살던 집을 전세로 놓고 2년 반 전에 여기로 옮겨왔다. 날이 갈수록 복잡해져만 가는 동네가 답답해지려는 때에 마침 이 단지에 사는 지인의 집에 놀러 왔다가 맑은 하늘과 신선한 공기, 근처에 자리한 나지막한 산을 보고 당장 이사를 결심한 것. 집 안 곳곳에는 부부처럼 소박한 가구들이 놓여 있고,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거실에는 선한 인상이 꼭 닮은 부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대법관 퇴임 이후 거액의 수임료를 올릴 수도 있는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밝힌 김 위원장과 그리고 그 결정을 누구보다 큰 박수로 지지했다는 강 변호사의 평소 생각을 엿보게 하는 단정하고 진실된 모습이었다.

LADY 환갑을 맞이하고, 법관 생활을 마감하는 등 최근 두 분 모두 굵직한 인생 고개를 넘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 같은데요. ‘행복한 인생’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강지원 최근 며칠간 자살예방법 국회 통과 건으로 무척 바빴어요. 지난해 1만5천여 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갈수록 자살률은 높아져만 가고 있어요. 행복하지 못하다는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부를 축적하고 성장 파이를 키우는 데만 급급해서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았어요. 먹고사는 데는 성공했지만 심리적으로는 실패한 거죠. 그 대표적인 모습이 사사건건 남과 비교하는 습관입니다. 내가 1억원이라는 큰돈을 벌었을 때 기쁘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옆 사람이 1억1천만원을 벌었다고 하면 화가 나죠. 저는 이게 ‘다름’의 철학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김영란 대체적으로 우리는 자존감이 무척 낮은 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자신을 공격하고 자학하는데, 스스로를 충분히 인정하고 자신에게 만족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해요.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식이든 배우자든 돈이든 어딘가에 의지하려 들게 되죠.

강지원 저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돈, 권력, 명성, 인기… 이런 것들을 갖고 목표를 세워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건 수단일 뿐이지 목표가 아닙니다. ‘돈을 10억 벌겠다’는 거칠게 표현해서 짐승 같은 목표라고 생각해요. 돈이라는 수단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목표로 삼는 게 맞지 않을까요? 저는 어린이들에게 “꿈이 뭐니?”라는 질문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대신 “무엇이 하고 싶니?”,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니?”라고 물어요. 그게 진짜 꿈이고 목표니까요.

김영란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법조계 후배들이 제게 ‘대법관이라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물을 때가 많은데, 저는 그때마다 “대법관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판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얘기해요. 이렇게 얘기하면 ‘당신은 이미 이뤘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다’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자리’가 아닌 ‘어떤 법률가’가 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난 30년 동안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판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왔고, 이제는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채워갈지를 고민하려 해요. 제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어떤 일을 좋아하는가를 천천히 찾아가야죠. 아, 일단 위원회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나서요. 인생이 워낙 예측하기 어려운 거라, 우선 주어진 일부터 열심히 하고 나서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웃음).

강지원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제가 조금이라도 세상에 보탬이 됐으면 좋겠고, 거기에 제가 가진 적성과 재능을 발휘할 수 있길 바라요. 나이도 자꾸 드는데, 몸이 움직일 수 있는 한 저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하면 최대한 힘을 보태고 싶어요. 행복한 사람들이 더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면요. 그게 남은 인생의 일거리이자, 목표이자, 행복이 될
겁니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제공 / 이성원, 푸르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