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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백경학] 세상을 바꾸는 것은 눈물이 아닌 웃음입니다

[동아광장/백경학] 세상을 바꾸는 것은 눈물이 아닌 웃음입니다

 2012-04-17

     “아저씨! 지금 옷을 빨아야겠어요. 너무 더러워서 못 참겠어요.”
“내가 보기에는 깨끗한 걸.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하자.”
“싫어요. 난 지금 할 거예요.”

참 난감했습니다. 백두산에서 멀지 않은 중국 퉁화(通化) 시의 한 호텔방에서 한밤중에 저는 룸메이트 호철이와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 호철이는 한번 ‘필(feel)’이 꽂히면 해야 하는 소년입니다. 머릿속에 가사가 떠오르면 노래를 불러야 하고 찐빵 생각이 나면 찐빵을 먹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이날 사건은 저녁을 먹다 옷소매에 간장이 튄 것에서 비롯됐습니다.
호철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옷을 빨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제게는 좁쌀만 한 얼룩이 호철이에게는 자두만 하게 보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겨우 뜯어말려 잘 넘어갔나 싶었는데 잠자리에서 갑자기 간장 얼룩이 생각난 것입니다. 성화에 못 이겨 결국 호철이에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게 옷을 빨라고 허락했습니다. 소매만 빨고 금방 나올 것으로 예상했는데 호철이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문을 두드려 열어 보니 ‘아뿔싸!’ 일이 터지고 만 것입니다. 호철이는 옷을 입은 채로 소매를 열심히 문지르고 있었습니다. 얼룩은 이미 없어졌지만 마음에 남은 간장자국을 지우지 못해 마음고생을 해야 하는 호철이와 아이를 지켜봐야 하는 호철이 부모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장애인 둔 가족들 고통의 나날

호철이와 저는 백두산 트레킹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장애청소년과 함께 떠나는 행사에 제가 호철이 멘토가 된 거지요. 자폐를 가진 호철이는 순하디 순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비행기에 오르자 그동안 가슴속에 묻어둔 질문을 속사포처럼 쏟아놓기 시작했습니다. 대답을 듣고도 “왜요?” 하고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마음으로부터 호철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자는 마음은 조금씩 사라지고 어느덧 매몰차게 대답하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이튿날이 되자 호철이가 조금씩 무서워졌습니다. 낭패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제 옆자리에는 시인 정호승 선생님과 자폐를 가진 승훈이가 타고 있었습니다. 승훈이에게 꽂힌 것은 송전탑이었습니다. 벌판에 세워진 송전탑이 보일 때마다 “저게 뭐냐? 왜 세웠느냐?”고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정 선생님은 저와 다르게 평온한 목소리로 같은 설명을 해주곤 했습니다. 승훈이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친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여행 마지막 날 헤어지는 순간에 호철이가 말했습니다. “제가 너무 고집을 피워 힘들었지요. 아저씨 미안해요.”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호철이를 좀 더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잘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호철이를 통해 많을 것을 배운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자폐아에 비하면 호철이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입니다. 한 어머니는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를 제지하기 위해 한시도 아이 손을 놓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아이에게 신경을 쏟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남편과 이혼한 뒤 그 어머니는 아이와 둘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자식의 장애로 인해 헤어지는 부부가 적지 않습니다.

은총이는 정맥혈관 기형 등 아홉 가지 희소난치병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1년밖에 살 수 없을 거라는 진단을 받은 뒤 오른쪽 뇌 절제수술을 받아 걸음걸이가 불편하고 말도 잘하지 못하지만 다행히 열 살이 됐습니다. 은총이 아버지 박지훈 씨는 난치병을 앓은 아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2년 전부터 철인3종 경기를 시작했습니다. 운동 한번 해본 적 없는 그는 은총이를 고무보트에 태운 뒤 허리에 끈을 묶어 수영을 하고 자전거와 휠체어를 밀면서 ‘은총이가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일구고 있습니다.

화상 장애를 딛고 선 작가 이지선 씨는 “사랑하는 아이가 장애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을 때 장애는 숨기거나 외면할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서로가 보듬어야 나아질 수 있습니다. 저도 화상으로 인해 참으로 아프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 친구,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응원 그리고 무엇보다 웃음의 힘이 컸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웃음의 힘’이 그들의 삶 위로

장애어린이 어머니의 소원은 각기 다릅니다. 목을 가누질 못하는 아이는 목을 가누는 일을, 말 못하는 아이에게는 어느 날 아이가 ‘엄마’ 하고 불러 주길 소망합니다. 걸음을 떼고 대소변을 가리는 것이 누구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기적 같은 일입니다.

우린 늘 스스로 가진 게 적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것이 훨씬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늘 불행합니다. 호철이와의 여행을 통해 장애를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이들이 앞으로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사회교육과 직업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절감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힘들었던 순간도 축제처럼 느껴집니다. 아직 할 일이 많아서 참 다행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웃음이기 때문입니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