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의 추억

김종옥 5월 칼럼 


종로 청운동에 있는 천막 농성장에 드나든 지 한 달 남짓이다. 자주 오지 않던 이 동네가 이제 이웃 동네인 듯 낯익다. 이곳은 청와대 근처라 고도제한이 걸려 있어 그런지 건물들은 단층이거나 3층 내외이고 도로도 좁다. 눈을 들어보면 청와대 뒤로 삐죽 솟은 북악산이 언제나 보이고, 그 위로 파란 하늘이 열려있다.


발달장애 국가책임제를 요구하고 있는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농성장 (푸르메재단 DB)
발달장애 국가책임제를 요구하고 있는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농성장 (푸르메재단 DB)


복잡한 도로나 높은 건물에 막히거나 가리지 않으니 마음이 무척 편하다. 별나게 시끄러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조용하다. 눈이 편안하고 귀가 고요한 곳에 있다 보면, 상대적으로 내 집은 얼마나 시끄럽고 야단스런 동네에 있는지 알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마치 번잡한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그런지 농성장 천막에 오가는 게 그리 고단하지 않다. 시내 한복판이거나 지하였으면 몹시 힘들었을 게다. (그런 뜻에서도, 광화문 광장 농성장을 지키는 세월호 분들이나, 광화문역 지하농성장을 1,842일 버틴 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얼마나 힘든 여정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천막농성장이라는 해방구


지난 4월 2일, 전국장애인부모연대는 청와대 앞에서 ‘발달장애 국가책임제’를 요구하며 209명의 장애 부모가 삭발을 하고 1박2일 노숙 농성을 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종로장애인복지관 앞에 천막을 치고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 회원들에게는 2016년 시청에 이어 2년 만에 다시 천막 농성이다. 이번에는 지방 회원들이 교대로 1박을 한다.


물론 이런 식의 의사표현이 맞느냐 그르냐에 대해 많은 말들이 오간다. 그러나 한참 더딘 장애복지에 있어서는 이런 끈질긴 투쟁으로 돌파해 온 부분이 많다. 일테면 단 하루를 앞당기더라도 그것은 유효한 투쟁이라는 말이다. 그 하루 때문에 누군가의 운명이 바뀌기도 하고 목숨이 오갈 수도 있다. 그 결연한 마음의 상징이 천막농성장이다. 천막농성장을 짓고 나면 이곳이 우리 삶의 표상이 되고 해방구가 된다.


청와대 앞에서 발달장애 국가책임제 요구에 관한 피켓을 든 회원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제공)
청와대 앞에서 발달장애 국가책임제 요구에 관한 피켓을 든 회원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제공)


이 익숙한 장소에서 익숙한 풍경이 벌어진다. 물론 공부도 한다. 지금 우리나라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의 복지가 어떤지, 어떻게 바꿔나가야 하는지 토론을 통해 ‘학습’하기도 하고, 투쟁 방식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오가기도 하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의’도 다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곳이 해방구인 이유는 속에 담았던 많은 이야기가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도 많은 음식과 함께.


천막 안 이야기가 터져 나온다


이곳에 나온 이들은 쉽사리 친해지고 쉽게 마음을 연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우리가 지나왔던 어리석은 희망, 허탈한 절망, 묵직한 슬픔 같은 것을 나눈다. 까마득한 절벽에 섰던 일, 먼지 날리는 길바닥에, 캄캄한 적막 속에, 사막 위에, 진구렁에 늪에 섰던 일을 얘기한다. 물론 반짝이는 웃음도, 가난한 희망도, 따뜻한 동료애도 있다. 늘 보름치 먹을거리가 쌓여있고, 이름 붙은 단팥빵이며 만두며 꿀빵이며 신기한 진상품 올라오듯 풍성하다. 각종 즙들도 있다. 선거철인 양 비타민 음료 박스 사이에 오미자즙, 배즙, 사과즙, 칡즙 박스가 놓인다.


날이 추우면 추위를 두고, 더우면 더위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꽃이 피었다고, 꽃이 졌다고, 어느 나무가 푸르다고 얘기하다가, 끼니때가 되면 골목을 뒤져 맛집 순례를 하기도 한다. 이젠 어떤 집 국수가 맛있는지, 어느 식당 음식이 허당인지 훤하다. 어느 골목길 돌담이 예쁜지, 어느 집 화단이 고운지도 눈에 익다. 그러니 농성장 나가는 일이 고단하기만 한 일이 아니다.



무릎에 담요를 덮고 앉으면 으레 아이를 낳던 일부터 더듬어 올라가서 처음 장애를 알았을 때 이야기로 시작한다. 열심히 찾아다니면 정말로 아이가 ‘치료’되는 줄 알고 미친 듯이 찾아다니던 그 숱한 조기교육실이며 치료실 이야기에다 최초의 좌절이었던 어린이집, 유치원에서 학교 이야기까지 연대기가 술술 풀려나온다. 너나없이 겪은 비슷한 과정에, 그 지난한 세월을 서로 위로하기도 하고, 선배엄마가 후배엄마에게 살아온 나날을 전해주며 격려하기도 한다. 삭발한 서로의 머리를 두고 유쾌한 수다도 떤다.


여기서는 대화할 때 남의 눈치를 보거나 조심할 필요가 없으니 실없는 농담도 자주 하는데, 예를 들면 걸어 다니는 폭탄을 둔 어미는 휠체어에 얌전히 누워있는 아이 엄마를 부럽다 하고, 휠체어 아이 어미는 길길이 뛰어다니고 소리라도 맘껏 지르는 아이 엄마를 부럽다 한다. 섭식관을 꽂아 미음을 넘겨주던 어미는 끝도 없이 음식을 먹어 비만이 된 아이 엄마를 부럽다 하고, 비만이 엄마는 뭘 줘도 고개를 내젓는 입 짧은 새다리 아이 엄마를 부럽다 한다. 오직 한 끼라도 맛난 것 실컷 먹는 모습 봤으면 원이 없는 엄마와, 허겁지겁 집어먹다 숨이 찬 아이 엄마의 부러움이 허공에서 엇갈린다. 그러다가는 그만 미안해져서는 대체 우리가 뭔 못할 말들을 이렇게 하고 있나 하면서 서로 붙잡고 운다.


우리의 부러움이란 것들


우리의 부러움이란 이런 것인가 싶어 헛헛해지는 것이다. 우리라고 왜 친구들하고 모여 수다를 떨면서 은근슬쩍 남편 자랑, 노골적 아이 자랑, 이런 거 하고 싶지 않겠는가. 아이가 뜀박질 하다가 넘어져 무릎 까졌다고, 그래도 또 튀어나가 놀기만 한다고, 공부는 뒷전이고 친구들이랑 싸돌아다니며 속 썩인다고, 사춘기라고 또박또박 말대꾸하면서 어미를 무시한다고, 어느새 날마다 연애질하러 나돈다고, 면접만 몇 번째인지 모른다고, 어느새 돈 번다고, 독립했다고, 기특하게도 어느 날 선물을 내밀며 꼭 안아줬다고, 카톡으로 하트 뿅뿅 사랑해요 보냈더라고......... 눈빛을 빛내며 이런 자랑, 이런 얘기에 끼어들고 싶지 않겠는가. 자식이 눈부시게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엄마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붙잡고서라도 자랑하고 싶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내가 내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자랑질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이 모든 과정을 우리 아이가 다 누리고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는 부질없는 희망, 그것이다. 다른 자식들의 평범한 일상, 그것이 ‘누리는’ 일이라는 걸 그들은 알까.



우리 아이들도 누리고 싶지 않을까. 우리 아이들도 잘 걷고 잘 뛰고 잘 앉아있고 잘 알아듣고 잘 먹고 잘 해내고 잘 말하면서 잘 사는 거, 그런 거 하면서 삶을 ‘누리고’ 싶지 않을까. 어미의 무엇을 포기하거나, 무엇을 내어주어서 우리 아이가 뭔가 ‘누리며’ 살 수 있는 게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런 흥정은 이미 까마득한 옛날 여러 번 해봤다. 찢고 버린 계약서가 휴지통에 그득하니까.


주토피아, 유토피아


우리의 희망은 무엇인가. 아이를 국가에 떠맡기자는 게 아니다. 내 새끼를 국가에서 책임지라고 내던져놓고 홀가분하게 살아가는 내 인생이란 것, 그런 것은 상상한 적이 없다. 나의 이번 생은 내 아이와 함께 이렇게 갈 거다. 우리들은 이 마음을 버린 적이 없다. 다만 세상이 최소한의 염치는 좀 갖춰줘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다수가 그들의 룰에 맞춰서 세상을 만들어왔는데, 그 틀에 안 맞는 이가 있다고 슬쩍 밀쳐내 버리면 되겠는가, 이 말이다. 아프고 불편한 이가 있는데 함께 보듬지 않고서 어떻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가, 이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한 자리는 보통보다도 더 크고 더 좋고 더 아름다운 꽃자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이 세상에 와서 차지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으니. 그러나 마치 국가책임제 요구를, 놀고먹겠다는 선언쯤으로 치는 처참한 소리들을 듣고 있는 이 마당에 할 소리가 아닌 것쯤은 안다.


다양성을 그리고 있는 ‘주토피아’의 한 장면 (출처 : 다음 영화)
다양성을 그리고 있는 ‘주토피아’의 한 장면 (출처 : 다음 영화)


‘주토피아’라는 만화영화가 있었다. 온갖 동물들에게 최적화된 시스템이 갖춰진 곳이다. 영화의 스토리보다는 영화에 그려진 구석구석을 살펴보느라 재밌는 영화였다. 기린에게 맞는 높이와 쥐에게 맞는 높이가 동시에 갖춰져 있고, 따른 맹수와 느린 나무늘보에게 맞는 속도가 동시에 허용되는 곳이다. 말하자면 ‘표준’이라는 강요가 없는 곳이다. 서로가 예의를 갖추고 지내는데 그것이 너무나도 몸에 배어서 자연스럽다. 억지로 참고 견디는 에티켓이 아니다. 나는 상대가 느리고 낮고 작아서 불편했겠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내가 빨라서, 높아서, 커서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니 서로 상대 때문에 불편한 게 아니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해방구에서 꿈꾸는 유토피아도 그런 곳이다. 그 사회의 소수자가 더 이상 스스로를 소수자로 느끼지 않는 평화로운 곳이 유토피아다.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것은 즐겁다. 투사들이 끝내 주저앉지 않는 것은 좋은 세상에 대한 상상을 그만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 봄에, 엄마라는 이름의 투사들은 청운동 천막 해방구에서 추억을 쌓고 있다.


덧붙이는 추억


1. 청운동이 바람은 좀 유난스럽다. 북악산도 나지막한 지붕도 아기자기한 골목도 다 고즈넉하고 예쁜데, 바람만은 좀 별나다. 천막은 비바람의 습격으로 여러 번 속절없이 들뜨고 휘날렸다. 그런데 농성장에 이 정도 침탈은 있어줘야 또 맛이 난다.
2. 농성장 천막은 종로장애인복지관 앞에 붙어 있다. 그래서 나는 푸르메에 글을 실으며 그 앞에서 천막도 치는 애매한 처지가 되었다. 농성장의 편의를 봐주신 푸르메 식구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글=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 부대표)










김종옥 자폐성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을 둔 김종옥은, 가끔 철학 인문학 관련 책을 쓰지만, 가장 쓰고 싶어 하는 SF소설은 아직 쓰지 못했다. 가끔 인문학 강의도 하고 지역 내 마을사람들 일에 두루 참견하며 바쁜 척하고 지내고 있다. 쓰임과 즐김이 있는 좌파적 삶을 살고 싶어 하며, 매일같이 세월호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지은 책으로 <철학의 시작> <처음 만나는 공자> <공자 지하철을 타다(공저)> <장자 사기를 당하다> <지구는 생명체가 살만한 곳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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