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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함께 일하고 지지하는 ‘일터 공동체’

[더 나은 미래] 함께 일하고 지지하는 ‘일터 공동체’

2017-09-26

[더나은미래 – 푸르메재단] 下
재활을 넘어, 성인기 ‘질적인 삶’ 가능하도록

“바라는 것 없어요. 막내딸보다 딱 하루만 늦게 눈 감으면 좋겠어요.”

올해로 11세, 다운증후군 막내딸은 천성이 맑다. 이순미(가명·43)씨는 “천사가 둘째 딸로 태어난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이씨는 늘 불안하다. 딸아이 키가 자라는 만큼, 엄마는 나이를 먹는다. “큰아이한테 ‘동생은 엄마가 끝까지 오래 함께 살다가 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했더니 ‘자기가 책임질 거니까 엄마는 걱정하지 말라’고 해요. 가족끼리 떠안는 불안감이 있어요. 아이가 아니라 사회가 불안감을 줘요.”

지난 25일, 백경학 푸르메재단 이사, 채춘호 종로장애인복지관 직업지원팀장 등이 세계 선진 장애인 재활시설 탐방기를 담은 책‘보통의 삶이 시작되는 곳’이 나왔다. 책 표지 사진의 주인공은 사지결핍증을 가지고도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라이앤 카 양.
지난 25일, 백경학 푸르메재단 이사, 채춘호 종로장애인복지관 직업지원팀장 등이 세계 선진 장애인 재활시설 탐방기를 담은 책‘보통의 삶이 시작되는 곳’이 나왔다. 책 표지 사진의 주인공은 사지결핍증을 가지고도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라이앤 카 양. /푸르메재단 제공

외면하고 싶은 불안은 때론 현실이 된다. 올해로 59세, 다운증후군 지적 장애 여성 김수지(가명·59)씨는 최근 뒤늦은 홀로서기 중이다. 한평생 챙겼던 60대 언니가 갑작스레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 다른 가족의 도움으로 급하게 활동보조인서비스를 신청하고 복지관 주간복지서비스를 받게 됐지만, 수십 년간 언니와 둘이서만 살아온 김씨에겐 목욕을 하거나, 밖에 나가는 것, 다른 사람들과 지내는 것 모두가 넘어서야 할 과제다.

◇재활과 치료 넘어, ‘존엄한 삶’ 고민 시작돼야

이민희 마포푸르메직업재활센터장은 “장애 아동이 성장기에 재활치료를 받고 특수교육과정을 지나고 나면, 이후에 남는 것은 삶을 꾸려가는 것”이라며 “장애주기별 정부 지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많은 장애 가족들이 ‘질적인 삶’에 대한 고민 없이 성인기를 맞는다”고 했다. “‘우리 아이가 재활치료 계속 받다 보면 조금 나아지겠지, 내 삶도 조금 숨통이 트이겠지’ 많은 가족이 이런 마음으로 청소년기를 버텨요. 한 달에 몇백만원씩 언어치료 등에 쓰기도 해요. 그러다 막상 성인이 되면 가족의 경제적인 부담은 말할 것도 없고, 시설에 거주하게 되거나 가족이 와해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센터장은 생애 주기에 따라 현재와 미래의 삶을 계획하고 지원하는 ‘평생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영·유아기에는 정확한 진단으로 치료를 받고, 학령기에 맞춰 또래를 사귀고 직업교육을 받으며, 성인기에는 직업을 갖고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등 생애주기에 맞는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

자립의 가장 큰 걸림돌은 뭘까. 채춘호 종로장애인복지관 직업지원팀장은 “‘일’을 구하기 힘들다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했다. 강력한 세제 혜택을 통해 BMW를 비롯해 대부분의 유명 제조업체에서 중증장애인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독일이나, 장애인을 분리하는 대신 사회구성원으로 인정하고 능력에 따라 활동한 만큼의 비용을 주정부에서 제공하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중증장애인 일자리를 위한 지원이 극히 부족하기 때문. 채춘호 직업지원팀장은 “발달장애 청소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15%만 일을 하고 나머지는 실업자가 된다”며 “발달장애 청년들이 일할 수 있도록 제도나 환경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했다.

◇연대하고 어우러진 공동체 일터….

지역사회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함께 모여 일하고 지지하며 살아가는 ‘삶터’가 있다면 어떨까. 기부자 1만명, 기업, 지자체와 협력해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한 푸르메재단에서 직업문화공동체 ‘푸르메마을(가칭)’을 상상하기 시작한 이유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는 “병원을 지을 땐 장애 아이들을 위한 재활 병원이 없으니 병원만 잘 지으면 된다는 마음이었다”며 “재활 치료받은 아이들이 청소년, 성인이 되는데 여전히 가족이 짊어져야 하는 몫으로만 남아 있는 걸 보며, 일하고 생활하는 ‘공동체’ 모델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가평의 아침고요수목원처럼 일반인들도 찾아오는 ‘일터 공동체’를 그린다는 것. 올해 말까지 구체화한 뒤,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모금을 시작할 계획이다. “원하는 일에 따라 목공소나 공방, 펜션도 있고, 각 기업에서 중증장애인들이 일할 수 있는 맥줏집, 카페, 캠핑장 등이 어우러진 공간이라면, 장애인에게는 좋은 삶터와 공동체를, 일반인에겐 언제든 찾아와 힐링하며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되지 않을까요?”.

주선영 더나은미래 기자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25/201709250180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