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조수미, 장애어린이에게 특별한 선물 "아이야, 맘껏 놀렴"

조수미, 장애어린이에게 특별한 선물 "아이야, 맘껏 놀렴"

2014-12-31

뇌성마비를 앓는 김소정(여·4) 어린이는 지금껏 한 번도 그네를 타지 못했다. 다리가 불편해서 한 발자국도 스스로 걷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이 그네 위에서 하늘을 바라볼 때 소정이는 휠체어에 앉아 땅만 쳐다봐야 했다.

29일 서울 종로구 푸르메 어린이 재활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소정이에게 뒤늦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도착했다. 특이하게 생긴 그네였다. 그네에는 엉덩이를 걸칠 수 있는 의자 대신 가로 80㎝·세로 120㎝ 길이의 철판이 달려 있었다. 철판 네 귀퉁이에는 안전고리가 달려있어 휠체어를 안전하게 고정시켰다. 소정이는 이날 처음 그네를 탔다. 휠체어에 앉은 채 그네를 타고 두 다리를 힘차게 앞뒤로 흔들었다.

29일 서울 자하문로 푸르멘센터에서 성악가 조수미씨가 푸르메재단에 휠체어 그네 2대를 기증하는 기증식이 열렸다. /장련성 객원기자

이날 소정이에게 그네를 선물한 사람은 세계적인 성악가 소프라노 조수미(52)다. 조씨는 29일 푸르메 재단에 휠체어 그네 2대를 기증했다. 한 대는 푸르메 재단이 서울 종로구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재활센터 옥상에, 다른 한대는 과천시 장애인 복지관에 설치될 예정이다. 조씨는 이날 열린 기증식에서 “어렸을 때 그네를 타며 하늘 보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다리가 불편한 어린 친구들도 마음껏 그네를 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씨가 기증한 휠체어 그네는 대당 1천만원이 넘는다.

조씨는 2년 전 공연을 위해 들른 호주 캔버라의 쿠메리 장애어린이 학교에서 처음 휠체어 그네를 본 후 한국의 장애 어린이에게 선물하겠다고 결심했다. 국내에선 휠체어 그네를 제작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외국 회사를 알아봐야 했다. 조씨는 직접 수소문 끝에 찾은 아일랜드의 한 회사에 올 9월 주문을 넣어 3개월 만에 휠체어 그네 2대를 받았다.

조씨가 장애인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다. 같은 반 친구 중에 다리를 다쳐 항상 목발을 짚고 다니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단지 걷는 게 불편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이 전부 그 친구를 괴롭혔어요. 그 친구도 갈수록 소심해져 점점 외톨이가 됐죠” 조씨는 어렸을 적 별명이 ‘여(여자) 깡패’라고 했다. 당시엔 덩치도 크고, 불의를 보면 못 참고 친구들과 걸핏 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 조씨는 매일 아침 그 친구의 집에 들러 등교를 같이했다. 집에 데려와 함께 놀기도 했다. “4학년 때 가난 때문에 그 친구가 전학을 갔어요. 왠지 모를 미안함 마음이 들더라고요”

1986년 데뷔 후 조씨는 공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공연이 없는 날엔 하루 8시간씩 노래 연습을 했다. 장애인에 대해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러던 중 조씨에게 ‘터닝포인트’가 왔다. 2011년 공연차 브라질에 들렀을 때 계단에서 발을 잘 못 디뎌 왼쪽 발목이 골절된 것이었다. 그날 저녁 목발에 의지해 공연을 마친 조씨는 다음날 휠체어에 앉아 다음 공연지였던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평생 처음 탄 휠체어였다. 수술 후 완전히 회복되는 데까지 3개월이 걸렸다. “하루 하루가 힘든 날이었어요. 나 혼자서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했죠” 당시 조씨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은 어릴 적 다리가 불편했던 친구였다. “평생 다리가 불편한 아이들은 얼마나 힘들지, 그것을 지켜보는 어머니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뒤돌아 보게 됐습니다”

이후 조씨는 기부 활동에 더욱 적극 나섰다. 2년 전엔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위해 8000만원을 기부했고, 매해 유니세프 자선기금 마련 공연을 벌이고 있다. 조씨는 ‘기부 활동은 음악 활동의 연장선에 있다’고 했다. “음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제가 노래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에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고, 살 만한 게 만드는 것이죠. 내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눠 갖는 것, 어려운 사람을 한 번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모두가 할 수 있는 ‘좋은 세상 만들기’ 아닐까요”

조씨는 새해 소망을 묻자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부도 꼭 실천해야 하냐’고 되묻자 조씨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답했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분들은 기부할 수 없는 게 당연해요. 하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바라보며 ‘언젠가 도와야지’라고 생각하면, 그게 기부의 첫걸음 같아요. 꼭 물질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따뜻한 말 한마디, 눈빛을 줄 수 있다면 좀 더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이준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