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섹션

[동아일보] 박범신 소설가 “마음은 색동옷 입고 있는데 몸이 늙어가니 슬프죠, 허허”

박범신 소설가 “마음은 색동옷 입고 있는데 몸이 늙어가니 슬프죠, 허허”

2015-03-05

새 소설 ‘꽃잎보다 붉던’ 인터넷 연재 중인 박범신

지난달 26일 박범신 소설가가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어린이재활병원 모금 프로젝트 ‘기적의 책 캠페인’ 서가 앞에 섰다. 그는 “여러 사람이 기부하는 방식으로 병원을 짓는다면 벽돌 하나하나에 많은 기부자의 정성이 깃들어 더없이 튼튼한 병원이 될 것”이라며 참여를 독려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3

‘영원한 청년작가’도 할아버지였다.

지난달 중순 박범신 소설가(69)는 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 중인 푸르메재단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국내에 단 한 곳도 없는 어린이재활병원을 짓기 위해 1억 원 모금 프로젝트 ‘기적의 책 캠페인’을 진행 중이니 동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박 작가는 24시간 소설 안에 갇혀 인터뷰와 강연, TV 출연 죄다 거절하고 있었다. 지난달 초 문학동네 인터넷 카페에 새 소설 ‘꽃잎보다 붉던’ 연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재단이 보낸 메일엔 바로 답장했다. “도울 일이 있다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지난달 26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박 작가는 “메일을 받고 손녀 넷이 생각났다”고 했다. 그는 산문집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에서 작가 무릎에 누워 잠든 첫돌 넘긴 손녀를 보며 “아이의 속눈썹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가슴이 막 뛴다. 파동이다. 생명으로부터 전이돼 오는 물보라이고 관계가 만드는 무지개다. 나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아이의 숨바람이, 내 볼에 시시각각 닿고 있다. 콧날이 시큰해진다”고 쓴 바 있다.

작가는 영락없이 ‘손녀 바보’였다. “손녀가 감기만 걸려도 마음이 아프고 속상해요. 가장 죄 없는 생명인 어린이가 죽을병에 걸리고 이를 지켜봐야 하는 것은 끔찍한 비극이죠.”

박 작가는 같은 날 트위터에 변산반도 노을빛 사진을 올리고 “사람은 사멸길 노인보다 생성길 아이가 더 예쁜데 자연은 그 두 가지가 공평하다”고 썼다.

그는 집필 중인 ‘꽃잎보다…’에 대해 묻자 “치매에 걸려 죽어가는 두 노인의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소설은 주변에서 작가에게 어울리는 노래라며 추천해준 가수 최백호의 ‘길 위에서’를 듣고 구상했다고 한다. 작가는 최백호 특유의 저음으로 흘러나오는 “긴 꿈이었을까, 저 아득한 세월이, 거친 바람 속을 참 오래도 걸었네”란 구절을 들으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구체화했다. “어린이가 아픈 일도 슬프지만 노인이 아픈 것도 큰 고통이에요. 일흔이 되니까 그 고통을 알 것 같고, 노화와 죽음의 고통을 무엇으로 이겨낼까 쓰고 있어요. 소설에 강력한 순애보적인 사랑도 나옵니다. 사랑이 아니고는 위로가 불가능한 병이죠.”

올 10월 칠순을 맞는 박 작가는 뜻밖에 문학과 세상사 속에서의 무기력과 분노, 극복 같은 단어들을 꺼내들었다. 2013년 가을 소설 ‘소소한 풍경’을 끝내고 1년 반 동안 소설을 쓰지 못했다. 그에게 긴 시간이었다.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면서 무력증도 겪었다. 그는 “우울이 깊으면 깊을수록 강하게 극복해야 한다. 나한텐 슬픔, 분노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창이 문장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새 소설을 쓰면서 고민도 생겼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색동옷 딜레마’다. 그는 ‘꽃잎보다…’가 생로병사라는 존재론적 의미를 묻는 노인들의 이야기니만큼 ‘늙은 문장’으로 써보려 했다. 그런데 문장의 감수성과 묘사는 반짝반짝하고 좀처럼 나이든 문장으로 바뀌지 않았다. “소설 문장이 너무 젊다, 영화로 옮겨도 되겠다”는 게 연재를 읽은 주변의 반응이었다.

“나이는 일흔인데 마음은 색동옷을 입고 있어요. 마음은 늙지 않는데 생물학적으로 노화의 세례를 받는 것이 딜레마죠. 젊은 감수성으로 노화와 죽음을 그리고 있어요. 매우 슬프죠. 허허”

인터뷰 도중 그는 “나는 영원한 청년작가”라며 웃었지만 그에게도 칠순은 특별하다. 그의 부모는 모두 칠순에 세상을 떴다. “올해까지 열심히 일하는 자식으로서 삶을 살 것 같아요. 내년엔 나 스스로가 ‘고향’이 되는 나이, 늙은이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축복으로 여기고 자유롭고 스스로 행복해지는 삶을 살겠습니다.”

작가는 올해 가을 음력 생일을 맞아 자축의 의미로 ‘꽃잎보다…’ 단행본과 단편전집을 출간할 예정이다.

기적의 책 캠페인은 푸르메재단과 교보문고, 동아일보가 함께한다. 매달 선정한 ‘기적의 책’ 20종을 교보문고 오프라인 14개 점포에서 구매할 때마다 권당 1000원이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짓고 있는 어린이재활병원에 자동으로 기부된다. 박 작가는 6월경 캠페인 ‘책 읽는 미러클 맨’으로 참가해 캠페인 참여 독자를 대상으로 강연할 예정이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출처 : http://news.donga.com/3/all/20150305/6995367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