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난 앵벌이…숱한 박대 이겨내고 1만여 명 후원 받아냈죠

난 앵벌이…숱한 박대 이겨내고 1만여 명 후원 받아냈죠

2016-05-21

박정호의 사람 풍경 국내 첫 어린이재활병원 개원,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 아내 사고로 다리 잃은 뒤 재활 관심
보상금 10억 내놓고 병원 건립 나서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가 어린이들의 재활치료를 돕는 볼풀(ballpool)에 앉아 있다. 그는 2005년 재단을 설립하며 집에 있던 TV·찻잔까지 가져왔다. “이달 말 개원하는 20대 국회에는 장애인 대표가 없다. 보건복지위원회에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하는 의원들이 많이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의 집무실에 들어서니 책상 뒤 벽에 달린 액자가 먼저 눈에 띈다. ‘처음처럼’ 넉 자가 선명하다. 올 초 타계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얼굴 같은 글귀다. 백경학(53) 푸르메재단(purme.org) 상임이사는 “내겐 죽비 같은 문구”라고 했다. 그는 지난달 말 서울 상암동에 문을 연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의 산파 역할을 했다. 약 30만 명으로 추정되는 장애아를 돕는 국내 첫 통합형 어린이재활병원이다. 시민 1만여 명, 기업·단체 500여 곳의 크고 작은 정성을 모아 건립했다. 부지를 뺀 총 공사비만 440억원. 백 이사의 표현을 빌리면 ‘마음으로 지은 병원’ ‘인간의 얼굴을 한 병원’이다.

- 죽비라니, 어떤 뜻인가.

“제가 쓰러지고, 넘어지고, 흔들릴 때마다 정신을 차리게 하는 글귀다. 이런 병원을 절박하게 원했던 시절의 마음을 잊지 말자고 다짐한다. 특히 ‘처음처럼’ 밑에 쓴 작은 글귀가 더욱 좋다.”

| 정호승·가수 션 등 셀럽들 후원
500여 기업·단체서 440억원 기부

고(故) 신영복 교수가 써 준 ‘처음처럼’ 글씨.

액자를 다시 뜯어봤다. 그가 말한 작은 글씨를 일부 옮겨본다.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병원을 완공한 게 ‘저녁’이라면 그는 이제 운영이라는 ‘새날’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16일 찾아간 재활병원, 새 건물 냄새가 물씬하다. 거울·의자 하나에도 몸이 불편한 아이들을 배려한 마음씨가 담겨 있다. 병실 한복판에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터를 마련했고 부모들을 위한 충분한 휴식 공간도 구비했다. 행동·언어·감각치료, 음악·미술·심리치료시설은 기본이다. 장애아 전문 치과도 있다. ‘통합형’이 한눈에 들어왔다.

- ‘국내 첫’이라는 수식어가 믿기지 않는다.

“시장 논리 때문이다. 물론 돈이 있으면 큰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재활치료는 돈이 되지 않아 대형병원도 꺼리는 편이다. 현재 어린이 재활병동이 있는 곳은 신촌세브란스 정도다. 보건 당국도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취약계층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만 해도 어린이 재활병원이 202곳이나 된다. 독일에는 140곳, 미국에는 40곳이 있다.”

서울 상암동 푸르메 어린이재활병원은 지상 7층, 지하 3층 규모다. 하루 장애 어린이 500여 명을 돌볼 수 있다.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도서관·수영장도 갖췄다. 사진은 건물 외경.

- 수많은 사람이 힘을 보탰는데.

“‘과연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너무 무모한 일을 벌인 건 아닌지, 걱정도 됐다. 위기의 순간도 많았지만 ‘개미군단’의 힘을 깨닫게 됐다. 후원자 개개인의 작은 홀씨가 모여서 희망이라는 꽃동산을 이룬 것 같다.”

- 취지가 좋아도 모금은 힘겨운 일이다.

“열 번 전화하면 한 번 통화를 할 수 있다. 또 열 번 통화하면 한 번 만날 수 있다. 일단 만나면 절반은 성사된 셈이다. 모금에도 전문성이 필요하다. 인정에 호소해서는 곤란하다. 기업이나 개인이나 다 사정이 있지 않은가. 시민단체(NGO)도 기부자에게 뭘 해줄 수 있는지 제시해야 한다. 이번 병원도 마포구를 설득해 부지를 확보했다. 30년 사용 후 기부채납을 약속했다. 땅이 있으니 사람들의 믿음을 살 수 있었다.”

- 자칭 ‘앵벌이’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앵벌이 앞에 ‘공익적’ 세 자를 꼭 넣어달라. 사익을 위한 게 아니다. 그래서 숱한 문전박대를 이겨낼 수 있었다. 100번의 실패가 있어야 한 번의 성공이 있다. 초대 재단 이사장을 맡았던 성공회 김성수 대주교가 하신 말이 있다. ‘성직과 사회사업이 뭐 다른지 아세요. 거창한 게 아니라 일종의 앵벌이예요!’라고 하셨다. 거절당한다고 낙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많겠다.

“한 분 한 분이 다 소중하다. 이번에 기부자들 이름을 병원 벽 한쪽에 새겨놓았다. 2005년 재단을 설립하며 많은 분의 도움을 구했다. 박완서·김혜자 선생님, 장영희 교수님 등 각계 인사가 어려운 순간을 이겨낸 사연을 모아 『사는 게 맛있다』라는 책을 냈다. 이후 박완서 선생님은 내는 책마다 첫 인세를 기부하셨다. 이해인 수녀님, 정호승 시인, 조무제 전 대법관 등등, 고마운 분들을 이루 셀 수 없다. 철인 3종 경기, 자전거 국토 종단 등을 하며 기금을 모은 홍보대사 션(가수)의 기여도 컸고….”

- 책 제목처럼 사는 게 맛있나.

“옛날에는 무척 썼는데 지금은 최소한 쓰지는 않은 것 같다. 이제 갈 길이 보인다. 낭떠러지에 떨어진 듯한 순간도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 어린이 재활병원 일 202곳, 독 140곳
국내는 드물어 취약계층 아이들 방치

 서울 상암동 푸르메 어린이재활병원 1층 로비.

백 이사는 실제 ‘낭떠러지’에 떨어졌었다. 언론사 기자였던 그는 1998년 여름 엄청난 불행을 겪었다. 독일 연수를 마치고 귀국 한 달 전 떠났던 스코틀랜드 가족여행에서 아내가 한쪽 다리를 잃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평생 흘릴 눈물을 그때 다 흘렸다”고 했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감히 꺼낼 수 없던 시기, 100일간 혼수상태였던 아내는 현지 의료진의 꼼꼼한 보살핌으로 생명을 건졌다.

하지만 한국 상황은 달랐다. 귀국 후 재활치료를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들은 모진 한마디 “병실이 없습니다. 2~3개월 기다려야 합니다”가 그의 항로를 바꿔놓았다. “아내를 위해 기도했던 수많은 이에게 감사하는 뜻에서 한국에 재활전문병원을 세우기로 결심했어요. 저도 아내가 다치기 전까지는 장애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거든요. 2002년 회사에 사표를 내고 소규모 맥주양조회사(옥토버훼스트)를 차려 종잣돈을 마련했어요. 영국 보험사와 8년간 소송하며 받은 피해보상금의 절반인 10억원을 재단에 내놓았습니다. 아내도 동의했고요.”

- 후회스러운 때도 있을 텐데.

“재단 설립 인가를 받으려고 보건복지부를 서른 번 넘게 간 것 같다. 떼쓰고 읍소하고 등등, 번번이 기본재산이 10억원이 넘어야 한다는 조건에 가로막혔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을 좋아한다. 재활병원을 만들겠다고 한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게 돼 감격스럽다. 평소 잊고 지냈던,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많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됐다.”

- 아내의 근황을 물어봐도 되나.

“교통사고 후유증은 무섭다. 도깨비통증(phantom pain)이란 환상통이 있다. 실제로는 다리가 없지만 잘린 부분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이다. 처음에는 한 달에 두세 번 찾아왔지만 요즘엔 일주일에 두 번가량 반복된다. 하루 이틀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예전에 아내와 저 모두 가해자를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참 그게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아내는 사회·자연과학서를 읽으며 고통을 이겨낸다. 재단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매년 성탄절에 직원들에게 식사 대접을 한다.”

| 장애인 문제 이젠 국가가 나서고
의료수가 조정 등 제도 보완해야

 서울 상암동 푸르메 어린이재활병원 3층 치과병원.

 - 왜 장애인 재활 문제가 중요한가.

“사회가 고령화되고 출산이 늦어지면서 장애아가 태어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조기진단과 재활치료가 핵심이다. 불행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장애인이 편하면 모든 사람이 편하다’고 했다. 장애 어린이 문제로 가정불화가 생기고 부부가 이혼하는 비극도 적지 않다. 소아장애의 90%는 후천적이다. 독일 통계를 보면 장애아를 치료해 사회로 내보내는 비용이 1이라면 그것을 방치해 나중에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3이라고 한다. 선택이 분명해진다.”

- 매해 30억원 넘는 적자를 예상했는데.

“재활병원은 하면 할수록 손해가 나는 구조다. 의료수가가 너무 낮은 편이다. 정부의 지원과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 민간에서 병원을 세운 만큼 이젠 국가가 나서야 한다. 장애인 문제를 개인에게 맡기는 것은 후진국형 해결법이다. 올해는 서울시에서 운영비 9억원을 도와주기로 했다. 복지부도 그 정도는 분담해야 하지 않을까. 병원 측에도 투명경영이란 과제가 있다. 더 이상 시민에게 손을 벌리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본다.”

[S BOX] 장애인 기업가 이철재씨도 10억원 후원

6년 전이었다. 백경학 이사는 마음이 바빴다.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 재활센터를 짓고 있었는데 공사비 85억원 가운데 20억원이 모자랐다. 완공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왔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때 평생 잊지 못할 인연이 찾아왔다. 푸르메재단에 매달 50만원씩 보태주는 이에게 감사하는 자리에서였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온 장애인 기업가 이철재(47·사진)씨가 병원 건립에 써 달라며 선뜻 10억원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숱한 인연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이철재 대표입니다. 결정적 고비에서 도와주셨죠. 요즘도 매달 한두 번 만납니다. 지난주에도 봤고요. 재단이 나갈 방향도 함께 논의합니다.”

이씨는 벤처기업가 출신이다. 고등학교 때 미국 유학을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신경과학을 공부하고 실리콘밸리에 게임소프트 개발회사를 차렸다. 2000년 귀국 후 게임 개발 및 컨설팅업체 쿼드디멘션스를 운영했다. 인연이 인연을 낳는 것일까. 2009년 쿼드디멘션스를 인수한 넥슨 측이 이 대표의 기부 소식을 듣고 나머지 공사비 10억원을 채워줬다. 넥슨은 이번 상암동 재활병원에도 가장 많은 200억원을 기부했다.

“불과 몇 달 새 모든 어려움이 거짓말처럼 해결됐습니다. 이씨는 재산의 절반 이상을 내놓았어요. 미국에서 제때 치료받지 못했다면 오늘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면서요.”

글=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출처 : http://news.joins.com/article/20058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