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내 장애를 무디게 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übler-Ross, 1926~2004.8.24)는 호스피스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종을 앞 둔 사람들이 직면한 심리적 변화를 ‘죽음 5단계(five stage of grief)’로 설명한 저명한 학자이다. 그녀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반응을 부정과 고립, 분노, 타협, 침체(절망), 수용으로 구분하였다. 뜬금없이 왜 죽음을 언급하나 싶을 테지만, 퀴블러 로스의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그녀는 죽음을 직면해야했던 환자들이 느꼈던 불안과 공포, 절망의 감정을 후천적 장애인도 유사하게 느낀다고 보았다.


파리 여행 중 에펠탑에서 기념사진 찍은 홍서윤
파리 여행 중 에펠탑에서

필자는 세상에 태어나 10여년을 자유롭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장애인’이 되었다. 장애인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면서 무수한 감정의 교차를 경험했고 그것이 어떤 심리상태였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세월을 흘려보내고, 어느 날 문뜩 생각을 떠올리니 ‘장애인’이라는 수식어가 그리 낯설지도 않았고, 처음처럼 그리 슬프지도 절망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만 느껴졌다. 많이 무뎌져버린 것이다. 어느 순간 받아들이게 된 나의 장애, 그런 감정은 어쩌면 퀴블러 로스가 말한 ‘수용’의 단계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필자 역시 지금까지 퀴블러 로스가 말한 다섯 가지 심리상태를 넘나들며 살고 있다. 그렇다고 장애 때문에 인생 전체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장애인도 때론 감정적으로 흐린 날과 맑은 날이 있듯이 그저 심리적 일교차가 나타나는 것뿐이라고 여긴다. 매번 맑은 날만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필자가 여전히 유쾌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떻게 장애를 극복하셨어요?”라는 말이다. 상대가 무심코 던지는 저 질문에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정말 장애를 극복했나? 그럼 나는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했나? 나는 장애인인가? 나는 나의 장애를 수용했나? 이러저런 복잡한 질문들로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키곤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항상 언제부터 이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내 인생을 돌이켜 보는 질문이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딱히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처음 ‘여행’이라고 느꼈던 강렬한 경험이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 첫 여행을 경험했을 때와 그 여행이 촉매제가 되어 더 멀리, 더 많은 여행지를 방문했을 때, 그리고 그 여행 뒤에 밀려오는 짜릿함과 허무한 감정 교차가 항상 떠올랐다.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나의 길은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네덜란드 휠체어 자전거 벨로(Velo)를 타고 있는 홍서윤
네덜란드 휠체어 자전거 벨로(Velo)를 타고

여행의 어원은 어떤 목적지에서 다른 목적지로 ‘이동’하는 것이다. 순수하게 ‘이동’하는 것이 여행인데, 여기에 개인의 선호와 목적이 덧붙여지면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유람과 관광이 가능해졌다. 여행을 보내주는 일 혹은 여행을 떠나는 일이 짧은 여흥을 즐기는 정도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장애인에게 여행은 가벼운 여가 활동만으로 해석될 수 없을 만큼 그 의미와 가치가 대단하다. 필자를 표본삼아 봐도 그러하지 않은가.


여행이 뭘까. 사실 여행은 정의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처럼 불변하는 수학적 개념도 아니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같은 철학적 이론도 아니다. 마이클 센델이 정의란 무엇이냐며 던지는 심오한 질문도 아니다. 물론 여행을 통해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지만 그런 것은 그냥 학자들이 하면 된다.


그렇다면 질문을 달리해 ‘나에게 여행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본다. 필자에게 여행은 삶이었고 행복이었고 이제는 사명이 되었다. 그만큼 여행이 주는 의미는 크다. 천 명의 여행객에게 여행이 무엇이냐 물으면 천 개의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여행이란 여행을 경험한 사람 모두가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목적지에서 느꼈던 감정과 경험의 총집합으로 여행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여행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며 누구도 그 경험을 똑같이 느낄 수는 없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여행이다.


독일 츄크슈피체에서 본 휠체어 탄 관광객
독일 츄크슈피체에서 본 휠체어 탄 관광객

여행은 각자의 가치와 선호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그 성격이 모두 다르다. 팔도강산에 숨어 있는 맛집을 찾아 떠나는 식도락 여행, 푸른바다를 감상하며 커피 한 잔을 즐기는 힐링 여행,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며 떠나는 배낭여행, 가족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효도 여행, 퇴사 후 해방감을 만끽하려는 퇴사 여행 등 모두 그 나름의 의미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누구도 만들어 내지 않는 온전한 여행자의 몫이다.


여행을 다니는 장애인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여행 그 자체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다. ‘비행기 한 번 타보면 소원이 없겠어요.’ ‘가족들과 함께여서 좋았어요.’ 같은 이야기를 한다. 반면 어떤 사람은 편의시설의 부재만 지적하는 여행을 하곤 한다. ‘거기 화장실이 더러웠어요.’ ‘경사로가 가팔라서 별로였어요.’ 등을 문제 삼는다. 또 어떤 사람은 체험 프로그램을 좋아하기도 한다. ‘가족들에게 주려고 비누를 직접 만들 수 있어서 좋았어요.’ ‘처음 한복을 처음 입어봤는데 색깔이 예뻐서 좋았어요.’ 같은 새로운 경험에 탄복한다. 독자 여러분은 어떤 여행을 기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덕수궁 탐방 전 일행과 함께 기념사진
덕수궁 탐방 전 일행과 함께

필자는 여행을 통해 삶의 변화를 경험했다. 여전히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닥치는 돌발 변수 앞에서 여전히 위축되기도 한다. 그것 또한 여행의 묘미라면 묘미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이 필자의 탓이라고 나의 장애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행을 하면서 마주한 장벽을 우회하는 법도 배웠고, 잔머리를 쓰는 법도 꽤나 늘었다. 사람을 만나는 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여행은 삶의 축소판 같아서 필자는 여행을 통해 사는 법을 연습해보았다.


여행을 하다보면 이러저러한 에피소드가 생긴다. 그것이 여행 에피소드일 수도 있지만 필자는 삶의 추억거리라고 생각하곤 한다. 접근할 수 있는 식당을 찾지 못해 편의점 도시락을 먹었을 때도 있었고, 휠체어 타이어가 펑크 나서 혼이 나가버린 일도 있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중국인 아저씨와 손짓 발짓 이야기했던 일도 있었고, 휠체어를 망가트린 공항 직원과 큰소리로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모두 삶의 어느 편에서고 생길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 여행은 언제나 변수투성이고 그걸 맞이할 준비가 된 사람은 여행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즐기기 시작하게 된다.


제주 관광지 답사 중인 홍서윤
제주 관광지 답사 중에

여전히 퀴블러 로스가 주장했던 다섯 개의 심리상태를 오락가락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필자는 여행을 경험하면서 삶을 가벼이 여길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여행 중에 겪었던 난처한 상황들이 현실과 다르지 않았고, 또 여행 중에 경험했던 기쁨의 순간은 일상 속에서 가끔 끄집어 내보는 보물 상자가 되기도 했다. 여행을 통해 내 몸의 장애를 조금 무디게 여기는 계기가 되었다. 여행이라는 삶의 예행연습을 통해 느꼈던 쓴맛, 단맛, 짠맛, 신맛이 필자의 인생에 반영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행은 달콤한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나의 아집과 철학을 뒤집어 놓을 수 있는 힘도 있다. 그러나 여행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오롯이 개인의 몫이며, 그 인식이 개인의 삶의 방향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그것이 여행이다.


*글, 사진= 홍서윤 (장애인여행문화연구소 대표)










홍서윤은 장애인여행작가이자 현재 한양대학교 관광학 박사에 재학 중이다. “당신이 여행을 갈 수 있다면 나도 갈 수 있다”는 생각. 장애인 여행이라고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장애인만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장애인도 함께하는, 모두를 위한 여행(Tourism for All)이 뿌리내리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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